“언제쯤 홀로 설 수 있을까요”…고통 여전한 세월호 생존자들

“언제쯤 홀로 설 수 있을까요”…고통 여전한 세월호 생존자들

오세진 기자
입력 2020-04-15 15:32
수정 2020-04-15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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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살고 있는 세월호 참사 생존자 윤길옥씨가 지난 1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참사 후 잃어버린 과거의 제 삶을 되찾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제주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제주에 살고 있는 세월호 참사 생존자 윤길옥씨가 지난 1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참사 후 잃어버린 과거의 제 삶을 되찾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제주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잃어버린 제 삶, 저 자신을 이제는 되찾고 싶어요.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주에 사는 화물차 운전기사 윤길옥(55)씨의 삶은 6년 전 ‘그날’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항우울제와 수면제 등 매일 대여섯가지 종류의 약을 먹어야만 잠을 잘 수 있다. 불은 항상 켜고 잔다. 윤씨는 “컴컴한 곳에 있으면 악몽 같은 기억이 되살아난다”고 말했다. 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군 맹골수도 해역에 침몰한 세월호에서 맨마지막으로 탈출한 생존자, 그게 바로 윤씨다.

참사 후로 6년이 흘렀다. 생존자들의 고통은 여전하다. 지난 2018년 12월 발표된 ‘4·16 세월호 참사 피해자 건강 및 생활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생존자 66명(단원고 생존자 41명, 일반인 생존자 25명)의 상당수가 우울증과 불면증, 만성두통을 앓고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생존자들은 참사를 직접 경험한 피해자지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숨겨야 했다. ‘아직도 세월호냐’는 비난과 ‘정부로부터 상당한 보상을 받았을 것’이라는 오해는 생존자들을 더욱 고립시켰다. 사회는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에 무관심했다. 세월호 참사 6주기를 앞두고 지난 10일 제주 서귀포에서 만난 윤씨는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사는지, 어떤 아픔이 있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고 말했다.

세월호 마지막 생존자 윤길옥씨
학생들 탈출 돕고 가까스로 생존
발에 화상 입고 2년 가까이 입원
퇴원 후 빚·대인관계 축소 고통
사진은 지난해 11월 30일 전남 진도군 팽목항의 등대길에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노란색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 모습. 2019.11.30 연합뉴스
사진은 지난해 11월 30일 전남 진도군 팽목항의 등대길에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노란색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 모습. 2019.11.30 연합뉴스
윤씨가 ‘그날’ 세월호 3층 선미(배꼬리)에 있는 화물차 운전기사 방을 나와 선수(뱃머리) 쪽 매점에 갔을 때 배가 기울었다. 온수통에 있던 뜨거운 물이 윤씨의 두 발을 덮쳤다. 발을 움직일 수 없던 상황에서 학생들을 먼저 대피시킨 윤씨는 바닷물이 머리 위까지 차오를 때 가까스로 배에서 탈출해 목숨을 건졌다. 얼마 안돼서 배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승객 476명 중 304명(미수습자 5명 포함)이 희생됐다.

정부는 2015년 6월 윤씨를 의상자로 인정했다. 하지만 윤씨가 다치고, 누군가를 구하고, 사투를 벌이며 탈출하는 과정에서 ‘국가’는 없었다. “밖에 나왔더니 기우는 배 객실 유리창 너머로 학생들이 보였어요. 해양경찰이 망치로 유리창을 깼으면 학생들을 많이 살릴 수 있었을텐데…. 그때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나요.” 그는 가슴을 쳤다.

2016년까지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은 윤씨는 퇴원 후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30여년 경력의 운송일이 그에겐 유일한 생계유지 수단이었다.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화물차 대신 2017년 새 차를 샀다. 집을 담보로 빚을 내 겨우 마련한 전재산이었다. 하지만 차 할부금에 기름값, 지입차 보험료, 수리비 등 빠져나가는 돈이 버는 것보다 많았다. 빚은 늘어만 갔다. 윤씨는 현재 개인파산 신청을 준비 중이다.

윤씨의 대인관계도 참사 후로 위축됐다. 그는 “원래 성격이 활달했는데 요즘은 어딜 가도 사람들이랑 말을 잘 섞지 않는다”면서 “예전에는 동네 목욕탕에 가면 2시간은 있었는데, 요즘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샤워만 하고 나온다”고 말했다. 실태조사 결과 생존자의 절반가량(48.5%)이 ‘(참사 후) 대인관계에 스트레스가 있다’고 답했다.

운동·절주를 통한 극복 노력 시작
앞으로 어떤 삶 살고 싶은지 묻자
“약 없이 편하게 자는 게 큰 소원”
전남 목포신항에 세워져 있는 세월호의 모습. 2014년 4월 16일 침몰한 세월호는 약 3년 뒤인 2017년 3월 23일 인양 작업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올라 같은 달 31일 목포신항으로 옮겨졌다. 연합뉴스
전남 목포신항에 세워져 있는 세월호의 모습. 2014년 4월 16일 침몰한 세월호는 약 3년 뒤인 2017년 3월 23일 인양 작업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올라 같은 달 31일 목포신항으로 옮겨졌다. 연합뉴스
윤씨는 보건소로부터 매달 안부 전화를 받는다. 그는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면 자살 충동이 인다”면서 “캄캄한 그곳에서 목까지 차오르는 바닷물을 들이킨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라며 괴로워했다.

퇴원 후인 2016년 3월 말 윤씨는 아픈 다리를 이끌고 진도군청에서 진도군 팽목항까지 수십㎞를 걸었다. 당시 그가 입었던 노란색 조끼에는 ‘진실을 인양하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 후로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장소를 가지 않았다. 아니, 가지 못했다.

“2017년 3월 인양된 세월호가 전남 목포신항으로 옮겨진 뒤에 ‘분실물을 찾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제 화물차가 세월호 화물칸 2층에 그대로 보관돼 있었던 거죠. 그런데 안 갔어요. TV를 보다가도 세월호 영상이 나오면 채널을 돌리거나 TV를 꺼요. 보기 힘들어요.”

그럼에도 살아남은 이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윤씨는 지난해 7월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참사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만날 마셨던 술도 이제는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이제 사람이 돼보려고 운동을 하고 술을 안 먹고 있다”는 것이 윤씨의 설명이다. 윤씨가 꿈꾸는 앞날은 어떤 모습일까.

“약 없이도 편하게 잠을 자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윤씨는 취미 활동을 갖고 싶어했다. 그는 “고교 때 밴드에서 트럼펫을 연주했었는데, 드럼과 기타 연주법을 새로 배우고 싶다”면서 “여건만 된다면 예전에 좋아했던 여행도 자주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세월호 참사 생존자 오용선씨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 다음 날인 지난 12일 제주시청 앞에서 “피해자의 치유를 위해서라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제주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세월호 참사 생존자 오용선씨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 다음 날인 지난 12일 제주시청 앞에서 “피해자의 치유를 위해서라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제주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또 다른 세월호 생존자 오용선씨
이 악물고 항우울제·수면제 끊어
참사 후 5개월 뒤에 복직했지만
트라우마로 복직 보름 만에 퇴사

지난 11일 서귀포에서 만난 또 다른 생존자 오용선(58)씨도 2016년 1월 말까지 항우울제와 수면제 등 7가지 종류의 약을 매일 먹었다. 오씨는 “약을 끊으려고 이를 악물고 악바리처럼 아등바등했다”라고 말했다. 30년 넘게 핀 담배도 끊었다.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오씨도 화물차 운송기사 경력이 30년에 달한다. 오씨는 참사 후 5개월 뒤에 복직했다. 그런데 밤에 운전할 때마다 헛것이 보였다. 야간근무가 불가피한 화물 운송일을 계속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오씨는 보름 만에 직장을 그만뒀다. 지금은 건설 현장에서 화물차로 폐기물을 운반하고 있다.

고통을 잊는 방법으로 오씨는 침묵 대신 말하기를 선택했다. 그는 “직장 동료들이 내가 생존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날 세월호에서 어떻게 탈출했는지 직장 동료들이 물으면 저는 다 얘기하는 편”이라면서 “저는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털어놓으면 속이 시원하고 후련하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큰 목소리로 말한 오씨는 “원래 목소리가 크다”면서 멋쩍게 말했다. 하지만 세월호를 연상시키는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오씨는 윗옷 지퍼 손잡이를 계속 만지며 말을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2017년 5월인가 6월쯤에 목포신항에 갔었어요. 우리가 탔던 배가 인양됐다고 해서 궁금해서 갔는데,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생각 없이 보려고 했죠. 계속 생각하면 기분이 안 좋으니까….” 오씨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지난 2월 ‘4·16 제생지’ 단체 창립
제주 생존자 24명 목소리 모은다
“진상규명·책임자 처벌이 치유 첫 관문”
사진은 지난 12일 오전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족들이 약 6년 전 세월호가 침몰한 전남 진도군 관매도 인근 해역에 헌화한 꽃다발의 모습. 연합뉴스
사진은 지난 12일 오전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족들이 약 6년 전 세월호가 침몰한 전남 진도군 관매도 인근 해역에 헌화한 꽃다발의 모습. 연합뉴스
오씨는 ‘제주 세월호 생존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모임’(4·16 제생지)의 대표를 맡고 있다. 제주에 사는 생존자 24명(윤씨와 오씨 포함)의 기억을 기록하고 법률 지원, 심리 치유 지원 등을 위해 지난 2월 만들어진 단체다. 오씨는 “앞으로 제주 생존자들을 차례로 만나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고 어떤 삶을 바라는지 이야기를 듣고, 제주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 어떤 안내와 지원이 필요한지를 시·도 또는 정부에 전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세월호 참사 피해자의 치료 및 지원체계는 현재 경기 안산에 집중돼 있다. 오씨는 “제주에 2015년 2월 개소한 제주세월호피해상담소가 있지만 제주도가 병원(제주 연강의료재단)에 위탁 운영하는 방식이라 언제 문을 닫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라면서 “상담소가 문을 닫으면 우린 갈 데가 없다. 필요하다면 트라우마센터 건립도 호소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오씨는 “생존자들이 세월호 참사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지금이라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세상, 그게 제가 제일 바라는 것”이라면서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피해자 치유와 일상 회복으로 향하는 첫 관문”이라고 덧붙였다.

제주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잊지 않겠습니다

세월호 참사 생존자들의 트라우마 극복을 생존자 개인의 노력에만 맡길 수는 없습니다. 생존자들이 참사 피해자이자 참사로 큰 슬픔을 겪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우리 사회가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연대가 필요합니다. 서울신문은 앞으로 ‘제주 세월호 생존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모임’(4·16 제생지)과 함께 앞으로 제주에 살고 있는 세월호 참사 생존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 전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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