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켜 쥔 시신의 손엔 독립선언서… 아우내 만세운동 ‘진짜 주역’

입력 : ㅣ 수정 : 2019-02-12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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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6>병천 진명학교 교사로 전체 계획 짠 김구응 의사
아우내만세운동기념공원에 있는 조형물. 유관순 열사가 선두에 있고 오른쪽 끝에 쓰러져 있는 사람과 그를 안고 있는 여성(원)이 보이는데 김구응 의사와 그의 어머니 최정철 여사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내문에는 김구응 의사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 아우내만세운동기념공원에 있는 조형물. 유관순 열사가 선두에 있고 오른쪽 끝에 쓰러져 있는 사람과 그를 안고 있는 여성(원)이 보이는데 김구응 의사와 그의 어머니 최정철 여사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내문에는 김구응 의사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옥중 투쟁을 하다 잔혹한 고문을 받고 순국한 유관순 열사가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열사가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주역이었음도 분명하다. 유관순은 3·1운동과 동일시되고 있고 항일의 표상이다. 그러나 유독 유 열사만 부각된 데는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연구 논문이 여러 편 있다. 친일·우익 인사들이 광복 직후 자신들의 과거를 정화하여 정치적·도덕적 권위를 찾으려고 열사를 ‘한국의 잔다르크’로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유관순의 항거는 이화여중 동문 박인덕과 교장 신봉조 등이 기념사업회를 발기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일제에 저항했다가 친일로 돌아선 인물로 광복이 되자 자신들의 행적을 덮으려고 유관순을 이용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우익 인사들의 유관순 기념사업이다. 미 군정하인 1947년 9월 결성된 유관순기념사업회는유관순 기념비, 영화를 만들고 ‘조선의 잔다르크’라는 제목의 전기를 간행했다(정상우, ‘3·1운동의 표상 유관순의 발굴’).
김구응 의사의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1915년쯤 찍은 병천교회 남자 교인들의 모습인데 뒤에 서 있는 성인들이 진명학교 교사라고 한다. 그 중의 한 사람이 김 의사일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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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응 의사의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1915년쯤 찍은 병천교회 남자 교인들의 모습인데 뒤에 서 있는 성인들이 진명학교 교사라고 한다. 그 중의 한 사람이 김 의사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에는 유관순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맡은 조병옥이 있다. 조병옥은 광주학생운동 배후 조종 혐의로 3년 동안 복역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지만 친일 의혹도 함께 받고 있다. 조병옥은 유관순과 두 집 건너 살던 이웃으로 그의 아버지 조인원도 아우내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대한민국 정부 경무부장이던 조병옥은 정부의 정통성을 찾는 방편으로 유관순을 한국의 잔다르크, 해방의 여전사로 부각시켰다(전해주, ‘성공회 병천교회의 3·1 아우네 만세운동에 대한 기여’).

이런 연유로 아우내장터 시위를 주도한 다른 인물들의 공적은 거의 파묻혔다. 실제 주동자로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숨진 김구응 의사(義士)도 그런 사람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신한민보는 아우내 만세운동을 유관순이 아닌 김구응, 박종만이 주도했음을 밝히고 특히 모친까지 학살당한 김 의사를 비중 있게 보도했다.

“천안군 병천시(川市·아우내장터)에서 의사 김구응이 남녀 6천4백인을 소집하야 독립을 선언할 새 일경이 아민(我民)의 기수(旗手)를 자(刺)코져 하거늘 기수는 적수(赤手)로 검도(劍刀)를 집(執)하니 유혈이 임리(淋·뚝뚝 흘러 흥건하게 떨어짐)할 시에…” 김병조 선생이 쓴 ‘한국독립운동사략’에 이렇게 씌어 있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도 거의 똑같이 서술하면서 주모자를 김구응이라고 했다.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에 있는 김구응 의사의 묘소. 뒤쪽에 어머니 최정철 여사의 묘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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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에 있는 김구응 의사의 묘소. 뒤쪽에 어머니 최정철 여사의 묘소도 있다.

김 의사는 임진왜란 진주대첩의 명장 김시민 장군의 12대손으로 1887년 7월 27일 천안 병천면 가전리 99번지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한학을 깨우친 의사는 청신의숙, 장명학교를 거쳐 병천 진명학교 훈도(교사)로 일하며 제자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유관순의 오빠 유관옥과 조인원의 아들 조만형은 그의 제자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충청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김 의사는 서울 이화학당에 다니다 3월 13일 고향 병천에 내려온 유관순과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조인원 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