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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리더십 잃은 통합 임정… 3대 구심점 ‘이·창·만’ 모두 떠나… ‘채소장수’ 윤봉길의 폭탄, 꺼져가던 임정 불씨 살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리더십 잃은 통합 임정… 3대 구심점 ‘이·창·만’ 모두 떠나… ‘채소장수’ 윤봉길의 폭탄, 꺼져가던 임정 불씨 살렸다

류지영 기자
류지영 기자
입력 2019-01-16 22:40
업데이트 2019-02-10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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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통합과 갈등 : 상하이 시기 ③ 임정, 외교에서 투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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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이 집회 장소로 사용했던 기독교 교회 ‘무얼탕’.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도 여기서 열렸다. 상하이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이 집회 장소로 사용했던 기독교 교회 ‘무얼탕’.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도 여기서 열렸다.
상하이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초기부터 이념과 지역에 따른 파벌싸움으로 갈등이 컸다. 독립운동 방법론을 두고 외교독립론과 무장투쟁론, 실력양성론이 대립했고 출신 지역에 따라 기호파(경기·충청)와 서북파(평안·함경)로 나뉘었다. 임정이 정말로 한성정부를 계승했는지를 두고 ‘승인·개조’ 논쟁도 불거졌다. 결국 임정의 ‘3대 축’인 이동휘(1873~1935)와 안창호(1878~1938), 이승만(1875~1965)이 차례로 조직을 떠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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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이 거주했던 상하이 융칭팡 지역. 지금은 카페 거리로 조성돼 있다. 상하이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이 거주했던 상하이 융칭팡 지역. 지금은 카페 거리로 조성돼 있다.
상하이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무능한 임시정부 갈아엎자”

노령정부(러시아)와 상하이정부(중국), 한성정부(한국)가 힘을 모아 통합 임정을 만든 지 1년이 지난 1920년 9월. 이승만의 진정성을 의심해 임정 내각 참여를 거부한 신채호(1880~1936)와 박용만(1881~1928) 등이 중국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를 세웠다. 이들은 분란만 일삼는 임시정부를 불신임하고 전 세계 한인들이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독립운동의 새 길을 찾자고 주장했다. 이듬해 2월 박은식(1859~1925)과 원세훈(1887~1959) 등도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발표했다. 임정의 무능함을 조목조목 지적한 뒤 신채호가 주장한 대표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같은 해 5월 만주 지역에서 김동삼(1878~1937)과 이탁(1889~1930), 여준(1862~1932)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개혁안’을 선언하고 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통합 임정이 설립 2년도 되지 않아 해체 위기를 맞게 됐다. 심지어 임정이 있던 상하이에서도 여운형(1886~1947), 안창호 등이 회의 참여를 선언했다. 임정 각료들은 “국민대표회의 소집 운동은 정부 파괴 행위”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이미 리더십을 상실했다는 것을 잘 알기에 버틸 힘이 없었다. 결국 1923년 1월 3일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회됐다. 한반도와 중국, 러시아, 미주 등에서 100여개 독립운동단체 대표가 모여 임시정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대회로 치러졌다. 경비는 러시아 레닌 정부가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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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임정 요인들의 휴식처로 쓰인 프랑스 조계 내 푸싱공원. 1920년대 여운형이 이곳에서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상하이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상하이 임정 요인들의 휴식처로 쓰인 프랑스 조계 내 푸싱공원. 1920년대 여운형이 이곳에서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상하이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3월 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조 제의안이 올라오면서 갈등이 불거졌다. ‘창조파’와 ‘개조파’가 끊임없이 공방에 나섰다. 창조파는 임정을 부수고 한성정부를 계승할 새 기구를 만들어 무력 투쟁에 나서자고 선언했다. 신채호와 문창범(1870~1938) 등 베이징과 러시아에 기반을 둔 이들이었다. 개조파는 임정이 1919년 3·1운동 결과로 생겨났다는 점을 들어 해체가 아닌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봤다. 안창호와 여운형, 김동삼 등 상하이와 만주 지역 출신이 많았다.

●‘창조파’ 새 정부 설립 결의… 분열 주범으로

이들은 합의안을 만들지 못하고 두 달 넘게 논쟁만 벌였다. 5월 15일 김동삼과 배천택(생몰연대 미상) 등 만주 지역 개조파들이 더이상 자리를 지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보고 회의장을 떠났다. 다른 개조파들도 대거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자 6월 창조파가 자기들끼리 회의를 열어 국호를 ‘한’(韓)으로 하는 정부 설립을 결의했다. 임정은 이들의 행동을 반역으로 보고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켰다. 그러자 창조파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코민테른(공산주의 국제연합) 지부로 달려가 “새 정부를 정식 국가로 인정해 달라”고 청원했다. 소비에트가 같은 사회주의자인 자신들의 편에 설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창조파 단독으로 세운 정부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어렵다고 보고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세력은 1920년 레닌 자금 배달사고에 이어 또 한 번 독립운동 분열의 주범이 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국민대표회의는 우리나라 독립운동 미래를 가늠할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6개월 가까이 무의미한 논쟁만 벌이다가 아무 성과도 내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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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쑹위안루 쑹칭링 능원 내 만국공묘에 있는 박은식의 묘비. 1993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돼 현재는 비석만 남아 있다. 그는 통합 임정에서 임시 대통령을 맡아 혼란스런 상황을 수습하려고 애썼다.  상하이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상하이 쑹위안루 쑹칭링 능원 내 만국공묘에 있는 박은식의 묘비. 1993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돼 현재는 비석만 남아 있다. 그는 통합 임정에서 임시 대통령을 맡아 혼란스런 상황을 수습하려고 애썼다.
상하이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독립운동가들 임정 각료 거부… 권위 추락

임정은 국민대표회의 결과에 따라 사라질 수도 있었지만 개조파의 탈퇴와 창조파의 무리수로 어부지리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미 임정의 ‘3대 주주’였던 이승만과 안창호, 이동휘가 사라진 뒤였다. 1921년 1월 이동휘가 임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떠났고, 같은 해 5월 안창호도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고자 임정을 탈퇴했다. 이승만은 1921년 5월 워싱턴회의(1921~1922) 참석차 미국으로 갔다가 자신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상하이로 돌아오지 않았다. 1922년 9월 하와이에 정착한 뒤 임정 업무에서 손을 뗐다.

결국 3년 가까이 지난 1925년 3월에야 박은식(1859~1925)이 임시 대통령이 돼 이승만을 탄핵했다. 이때 임시의정원이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헌법을 위반했다는 의견도 있다.

김희곤(65)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은 “당시 임정은 재정난과 신뢰도 추락 등으로 의사 정족수를 채우기 불가능했다. 합법적으로는 이승만을 쫓아낼 방법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의 탄핵을 쿠데타라고 볼 수도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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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 황포탄 의거 현장인 와이탄공원 일대. 1922년 3월 28일 의열단원인 오성륜과 김익상이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처단하고자 공작에 나섰던 곳이다. 영화 ‘밀정’에 등장한 ‘속사포’(조진웅 분)의 모델로 알려진 오성륜이 권총을 발사했으나 다나카 뒤에 있던 영국인 여성이 맞아 절명했다. 상하이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중국 상하이 황포탄 의거 현장인 와이탄공원 일대. 1922년 3월 28일 의열단원인 오성륜과 김익상이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처단하고자 공작에 나섰던 곳이다. 영화 ‘밀정’에 등장한 ‘속사포’(조진웅 분)의 모델로 알려진 오성륜이 권총을 발사했으나 다나카 뒤에 있던 영국인 여성이 맞아 절명했다.
상하이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내각책임제 초대 국무령 이상룡 임명

임정은 대통령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바꾸고 최고 지도자인 국무령의 임기(3년)도 정했다. 이승만에게 임기 없는 대통령직을 맡겼다가 혼란을 겪은 데 따른 학습 효과였다. 같은 해 9월 서간도 무장단체 ‘서로군정서’의 책임자 이상룡(1858~1932)을 초대 국무령에 임명했다. 그는 김동삼과 김좌진(1889~1930) 등을 각료로 선임했지만 대부분 상하이로 오지 않았다. 임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서였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상하이 요인들이 싸움만 일삼자 이상룡은 몇 달 만에 자리를 내던졌고 1926년 2월 면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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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커우 의거 전날인 1932년 4월 28일 김구와 윤봉길이 함께 식사하며 세부 계획을 논의했던 상하이 팔선교 중국기독교청년회관. 지금은 호텔로 쓰이고 있다. 상하이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훙커우 의거 전날인 1932년 4월 28일 김구와 윤봉길이 함께 식사하며 세부 계획을 논의했던 상하이 팔선교 중국기독교청년회관. 지금은 호텔로 쓰이고 있다.
상하이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같은 달 임정은 대한매일신보 주필 출신 양기탁(1871~1938)을 국무령으로 지명했지만 스스로 취임을 거부했다. 5월 안창호를 국무령으로 선출했지만 반대 세력인 기호파(경기·충청 지역 파벌)가 강하게 반발해 물러났다. 7월 홍면희(1877~1946)가 국무령이 됐지만 임정 분규가 끊이지 않자 12월 내각 총사퇴를 선언했다. 당시 임정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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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훙커우 공원(현 루신공원)에 있는 윤봉길 기념관 내 전시물. 1932년 12월 19일 일본 이시카와현 육군공병작업장에서 일본 헌병이 쏜 총탄이 그의 이마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상하이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상하이 훙커우 공원(현 루신공원)에 있는 윤봉길 기념관 내 전시물. 1932년 12월 19일 일본 이시카와현 육군공병작업장에서 일본 헌병이 쏜 총탄이 그의 이마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상하이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통합 임정이 세워지던 1919년만 해도 상하이에는 독립운동가가 1000명 가까이 됐다. 하지만 6~7년 뒤인 1920년대 중반에는 고작 수십 명밖에 남지 않았다. 상당수는 상하이의 외교독립론에 실망해 다른 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조만간 독립이 될 것으로 보고 새 나라에서 요직을 차지하려던 ‘쭉정이’들은 일본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떠났다. 일부는 국내에 잠입한 비밀요원들에게서 “대다수 민중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에 관심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요즘 말로 하면 ‘번아웃 증후군’(심리적 탈진현상)에 빠진 것 같다. 상하이정부 창립 멤버였던 소설가 이광수(1892~1950)도 한국인들이 일제에 순응해 가는 현실에 실망해 독립운동을 접고 신여성 허영숙(1897~1975)과 재혼하겠다며 1921년 4월 한국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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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커우 의거 직전 김구(왼쪽)와 윤봉길이 함께 찍은 사진. 서울신문 DB
훙커우 의거 직전 김구(왼쪽)와 윤봉길이 함께 찍은 사진.
서울신문 DB
1926년 12월. 지리멸렬하던 임정에서 잠시 국무령을 맡았던 이동녕(1869~1940)은 그간 주목받지 못한 후배 운동가에게 자리를 넘겼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도 하겠다는 이가 없어 억지로 떠넘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임정 최고 지도자에 오른 이가 바로 김구(1876~1949)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원래 임정은 사제폭탄 사용을 금지하고 외교적 노력을 우선시했다. 하지만 김구는 이 원칙을 고수해선 얼마 안 가 임정이 사라질 것이라는 점을 잘 알았다. 살아남으려면 뭐라도 해야만 했다. 1931년 10월 임정 주석이던 그는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고자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김원봉(1898~1958)을 단장으로 한 무장투장단체 의열단(1919~1935)을 모델로 했다. 당시 의열단은 황포탄 의거(1922) 등으로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역사학계에서는 김구나 김원봉의 공작 시도를 이슬람국가(IS) 등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테러’와 구별하기 위해 ‘의열 투쟁’으로 부른다.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5개월간 6건의 암살, 폭파를 기획했다. 대부분 실패하거나 미수에 그쳤다. 그럼에도 1932년 1월 이봉창(1900~1932)이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1901~1989)에게 수류탄을 던져 한국인들의 저항의식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은 고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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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일왕 수류탄’ 임정 존재감 일깨워

이봉창 의거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상하이 훙커우 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하던 허름한 차림의 동포 한 명이 김구를 찾아왔다. 자신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싶으니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다.

“선생님, 제가 채소바구니를 짊어지고 날마다 훙커우 일대를 다니는 이유가 있습니다.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하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죠. 아무리 생각해도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으니 선생님께서….”

충남 예산에 아내와 세 자녀(1녀 2남)를 남겨두고 혼자 상하이로 건너왔다는 스물네 살 청년 윤봉길(1908~1932)이었다. 4월 29일 그가 훙커우 공원에서 던진 폭탄이 끝없이 추락하던 임정의 판도를 극적으로 바꿔 놓는 ‘게임 체인저’가 될 줄은 그땐 누구도 몰랐다. 윤봉길이 없었다면 임정 존속과 한국 독립 또한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상하이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2019-01-17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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