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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한 포기에도 4·3은 있었다”

“풀 한 포기에도 4·3은 있었다”

이슬기 기자
입력 2018-11-18 23:02
업데이트 2018-11-19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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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인의 사랑’ 속 그 남자, 현택훈

세 번째 시집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30년 터전 제주 재발견… 일상 시로 노래
“슬픈 봄이지만 그래도 새 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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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자신의 서점에서 자신의 시집을 들었다. “원래는 1년 해보고 장사가 안 됐으니 접었어야 했는데, 마침 건물주가 시인이어서 임대료를 저렴하게 해줘서 1년 더 연장했어요.” 이래저래 시 덕 보고 사는 시인이다.  현택훈 시인 제공
시인이 자신의 서점에서 자신의 시집을 들었다. “원래는 1년 해보고 장사가 안 됐으니 접었어야 했는데, 마침 건물주가 시인이어서 임대료를 저렴하게 해줘서 1년 더 연장했어요.” 이래저래 시 덕 보고 사는 시인이다.
현택훈 시인 제공
“뚱뚱한 시인은 첨 봐요.” 술 한 잔을 기울인 감독의 첫 마디는 그것이었다. 자고로 시인이란 김수영처럼 마르거나 기형도처럼 날카로운 느낌이 아니었던가.

시인은 가방에서 자기 시집을 꺼내들었다. “게임 좋아하고 식탐 있고, 한 달에 30만원 버는데 시는 한없이 서정적이고…. 캐릭터가 재밌다면서 일주일 만에 시나리오 초고를 써왔더라고요.” 지난해 9월 개봉해 1만 관객을 동원한 김양희 감독의 영화 ‘시인의 사랑’은 이렇게 탄생했다.

김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뚱뚱한 시인’ 현택훈(44)씨가 세 번째 시집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걷는사람)를 냈다. 전작 ‘남방큰돌고래’(2013)에 이어 또 제주도 얘기다. 시인은 늦깎이로 대학에 들어갔던 20대 중반 이후 십여년을 제외하곤 나고 자란 섬 제주를 떠나지 않았다.

“제주 바다와 한라산이 저한테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길어야 백년 살다 가는데, 저 산이나 바다는 아무 데도 가지 않잖아요. 계속 계속 그 자리를 지키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17일 그날도 제주에 있어 전화로 만난 시인이 하는 말이다. 천혜의 관광지 제주에서, 그는 시 쓰는 사람이기 이전에 생활인이다. 그의 시는 유명 관광지 대신, 소소하고 사소한 제주의 일상을 환기시킨다. 그의 눈에 제주는 ‘송사리 같은 아이들/슬리퍼 신고 내달리다/한 짝이 벗겨져도 좋은 길’(시 ‘솜반천길’)이 있으며, ‘제대하고 고향에 와서 백수일 때 다니던 회사 거래처 공업사에 나를 취직시켜주며 집에만 있지 말고 일하면서 시 쓰라’(시 ‘성환星渙’)던 친구가 묻힌 곳이다. “잘 알던 감귤 창고도 막상 가보면 낯설 때가 많더라고요. ‘내가 알고 있는 제주도가 다가 아니구나’ 했어요. 숨어 있는 찻집이라든지 극장 있던 자리 같은 소소한 것들이 일종의 사물화가 된 거 같아요. 풍경이 아니고 하나의 도구처럼.”

시집을 구상할 당시에는 ‘4·3 사건’으로 전부를 채우고 싶은 바람이 있었단다. 2013년 시 ‘곤을동’으로 제1회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한 것도 그런 책임감에 한몫 했다. 막상 해를 거듭하고, 시집을 묶을 때가 돼서 보니 겉으로 드러나게 ‘4·3’인 시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제주에서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4·3’과 무관한 게 없다는 게 시인의 설명이다. 낭만적인 프러포즈에나 어울릴 법한 시 ‘조수리의 봄’도 그렇다. ‘날 따뜻해지면 우리 결혼하자/너의 일기장을 훔쳐 읽을 거야/내가 몰랐던 시절의 너를 다 알아낼 거야’

조수리 하동은 4·3 당시 40여가구가 모여 살다 1948년 12월 토벌대의 방화로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죽음으로 인해 알지 못하는 이와의 영혼 결혼식 같은 느낌을 바탕으로 했어요. 그것을 슬프게만 그리지 않고 희망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슬픈 봄이지만 그래도 새 봄이 오면….”

다시 만난 고향에서 국수공장에도 다니고, 영화에서처럼 초등학교의 방과후 교사도 하던 시인. 지금은 낮에는 도서관 사서로, 저녁에는 서점 주인장으로 지낸다. 그는 지난해 4월 제주시 아라동에서 시 전문 서점인 ‘시옷서점’을 열었다. “서울에 가보니 시 전문 서점은 있는데 보통 유명한 시인들 책 위주더라고요. 시옷서점에서는 유명 시인 아니어도, 무명이어도 괜찮아요.” 화장실 포함해 10평 정도 되는 공간에 시집 500여권을 보유하고 있다. 동네 시인들의 사랑방 역할도 한다.

아무 데도 안 가는 제주처럼 시인도 정말 아무 곳에도 가지 않는 걸까. 물었더니 의외의 말이 돌아왔다.

“저는 시간을 다시 돌린다면, 서울에서 살고 싶은 생각도 많아요. 서울에 잠깐 갔을 때 제일 좋았던 게 ‘익명성’이었어요. 제주도에서는 큰 길가에만 잠깐 서 있어도 아는 사람이 몇 명 지나가거든요. 서울에서는 모든 게 다 낯설고, 다 모르는 사람이고 해서, 그 느낌이 좋았어요. 낯설고 외로워질 때 시가 잘 나와서요.” ‘30년 터전’이 낯설어 시로 노래한 그가 언제 다른 낯선 곳을 찾아 떠나게 될지 궁금해졌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2018-11-19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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