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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프로젝트-독립운동가의 명패] 박열의 일본인 아내이자 동지…92년 만에 독립유공자 인정받다

[3·1운동 100주년 프로젝트-독립운동가의 명패] 박열의 일본인 아내이자 동지…92년 만에 독립유공자 인정받다

이경주 기자
이경주 기자
입력 2018-11-12 21:08
업데이트 2018-11-13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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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왕 암살 계획’ 가네코 후미코 여사

조선 충북에 살면서 ‘만세 운동’에 감격
일본에서 박열 詩 ‘개새끼’ 접한 뒤 동거
첫 공판 때 조선 옷 입고 “나는 박문자”
사형 선고받는 자리서도 “만세” 외쳐
보훈처 “후손 찾는 대로 서훈·명패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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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법정에서 안고 있는 사진에 대해 보도한 1927년 1월 21일 동아일보 기사. 보훈처 제공
부부가 법정에서 안고 있는 사진에 대해 보도한 1927년 1월 21일 동아일보 기사.
보훈처 제공
1920년대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을 바탕으로 박열 의사와 일본에서 히로히토 일왕 암살을 계획했던 가네코 후미코 여사가 유명을 달리한 지 92년 만에 한국의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다. 일본인이지만 박 의사의 아내이자 독립운동을 함께 한 동지였던 그는 사형을 언도받는 순간까지 일본 재판정에서 의연하게 일본을 훈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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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의사와 부인 가네코 후미코가 재판정에서 안고 있는 모습을 재현한 영화 ‘박열’의 한 장면.
박열 의사와 부인 가네코 후미코가 재판정에서 안고 있는 모습을 재현한 영화 ‘박열’의 한 장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12일 “순국선열의 날(11월 17일)에 가네코 여사가 독립유공자 서훈(애국장)을 받게 됐다”며 “후손(친족)을 찾는 대로 서훈과 함께 독립유공자의 명패를 전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가네코 여사와 박 의사는 당시 조선과 일본에서 소위 뉴스메이커였다. 박 의사는 서울 고등보통학교(경기고의 전신)에 다니던 18세 때 3·1운동의 전면에 나섰다가 같은 해 10월 현해탄을 건너 도쿄에 정착했고 신문배달, 날품팔이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가네코 여사는 방탕한 아버지가 호적에 올리지 않아 조선 충북 부강면에 살던 고모부의 양녀로 자랐다. 그는 1919년 3월 30일 부강 지역의 만세운동을 보고 ‘감격의 눈물이 샘솟았다’고 기록했다. 같은 해 4월 일본의 외가로 돌아왔고 아나키즘을 접했다. 가네코 여사는 박 의사의 ‘개새끼’란 시를 우연히 보았고 친구를 통해 1922년 박 의사를 소개받았다. 같은 해 5월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고 ‘인간의 절대평등에 가장 큰 장애물은 일왕’이라는 생각을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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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에게 사형을 언도한 판결문 사본. 허무적 사상을 품고 박열과 의기투합해 한집에서 동거하고, 1923년 가을쯤 거행되는 일본 왕세자의 결혼식 때 폭탄을 투척해 위해를 가할 것을 모의하고 폭탄을 입수하려 한 증거가 인정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보훈처 제공
가네코 후미코에게 사형을 언도한 판결문 사본. 허무적 사상을 품고 박열과 의기투합해 한집에서 동거하고, 1923년 가을쯤 거행되는 일본 왕세자의 결혼식 때 폭탄을 투척해 위해를 가할 것을 모의하고 폭탄을 입수하려 한 증거가 인정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보훈처 제공
박 의사는 이 시기 흑도회에 가입하고 잡지 ‘흑도’를 발행했다. 가네코 여사는 ‘박문자’(朴文子)라는 조선 이름을 썼다. 이들은 “어떤 고정된 주의가 없다”며 마르크스, 레닌조차 추종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1922년 8월 박 의사가 니가타현의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의 참혹한 현장을 접한 게 두 사람이 의열 투쟁에 나선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두 사람은 1923년 10월 일본 왕세자의 결혼식에서 일왕을 암살하기 위해 폭탄 유입에 나섰지만 폭탄 투척 계획이 누설돼 체포됐다. 1923년부터 1925년까지 각각 20회 이상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1926년 2월 26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첫 공개 공판에서 조선 예복과 사모관대를 입고 출두한 박 의사는 이름을 묻는 재판장에게 “나는 박열이다”라고 답했다. 또 가네코 여사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박문자”라고 말했다. 3월 26일 열린 최종 판결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지만 박 의사는 “재판은 유치한 연극이다”라며 재판장을 질책했고 가네코 여사는 만세를 외쳤다.

일본 검찰은 사형 대신 무기징역으로 특별 감형했지만 가네코 여사는 옥중에서 은사장을 찢어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1926년 23세였던 가네코 여사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그의 어머니에게 전해졌지만 의문사였다.

그해 박 의사와 가네코 여사가 재판소에서 다정하게 서로를 안은 채 앉아 있는 ‘괴사진’이 유포됐다. 다테마쓰 판사가 증거 확보를 위해 박 의사의 환심을 사려 찍은 것으로 밝혀졌고 당시 일본 야당은 사법권 문란으로 내각 총사퇴를 주장하는 등 후폭풍이 일었다. 이 내용은 2016년 영화 ‘박열’로 다뤄졌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2018-11-13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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