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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하나 제대로 못 보고 인생 마감… 그래서야 되겠나”

“그림 하나 제대로 못 보고 인생 마감… 그래서야 되겠나”

임병선 기자
입력 2018-08-15 17:52
업데이트 2018-08-1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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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색채 분석 몰두한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소장

“평생 그림 하나, 꽃 하나 제대로 못 보고 마감하는 게 우리 삶입니다.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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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이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15년간 몰두해 온 우리 미술의 색채 분석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이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15년간 몰두해 온 우리 미술의 색채 분석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광복절 경축식이 열리기 전날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에 있는 일향(一鄕)한국미술사연구원을 찾았더니 강우방(77) 원장이 3시간여 인터뷰가 끝날 즈음 되물었다. 강 원장은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유홍준 교수가 추사 위작(僞作)들을 진품인 것처럼 소개한다고 지적해 업계에 작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국립경주박물관장이었을 때도 국정감사를 나온 국회의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 “검토해 보겠습니다” 대신 “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대꾸했던 그다.

서울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중앙박물관 학예사로 ‘어렵게 취업’해 밤낮없이 그림과 불상과 도자기 등을 들여다보며 모든 것을 홀로 공부했다. 박물관에 고고학과나 미술학과를 나온 인재들은 수두룩했지만 그처럼 매년 몇 편의 논문을 꾸준히 내놓는 이는 많지 않았다.

2000년 이화여대 초빙교수로 옮긴 뒤 2004년 이대 후문 쪽에 연구원을 처음 열었다. 성덕대왕신종(속칭 에밀레종)에 새겨진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마을’이 되었네”라는 명문을 보고 무릎을 탁 쳐서 이름 붙였다. 10여년 전 그리스 유적들을 돌아보다 벼락 맞은 것처럼 깨달았다. 우리가 보는 예수나 부처 그림 가운데 아이콘은 20%에 불과하고 장식(ornament)이 80%를 차지하는데 세상 누구도 이 장식을 연구하고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늘 독학했기에 가능한 깨달음이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때부터 장식들에 숨겨진 의미들을 파헤쳤다. 수많은 장서와 슬라이드 책자로 둘러싸인 연구원 안에 색채 분석 방이 따로 있다. 꽃과 새, 패턴 문양 등이 어떤 순서로 그려졌는지 원리 원칙을 톺아봤다. 그렇게 분석하며 색칠한 그림만 9000점이 된다고 했다. 작업 순서를 나타내기 위해 한 색 칠하고 스캔 뜨고 다른 색 칠하고 스캔 뜨고 했다. 컴퓨터 화면을 보며 클릭할 때마다 작업 순서에 따라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엄청난 공력이다. 데스크톱 컴퓨터 용량이 웬만한 기업의 데이터 용량과 맞먹는 15테라바이트인 것도 그 때문이다.

강 원장은 “보통 오전 11시쯤 출근해 연구원에서 밤늦게까지 머무른다”며 “해야 할 일이 잔뜩 밀려 있고 매주 수요일 문하생 수업이 있어 준비하고 논문 쓰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고 했다. 접근하기 쉬운 인상이 아닌데 웃으면 아이 같은 면모가 드러나는 것이 신기했다. 종일 연구에 붙들려 있는데도 스스로도 “시력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게 이상할 정도”라고 했다. 비결을 물으니 “색채 분석에 몰두하다가 궁금증이 해소되면 온몸에 희열이 뻗친다. 그 덕에 이렇게 건강한 것 같다”며 웃었다.

그렇게 15년을 색채 분석에 매달려 우리의 불화(佛畵)나 중국 자금성의 장식, 프랑스 고딕 양식이나 그리스 이오니아 양식 등이 모두 한 뿌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른바 ‘영기화생(靈氣化生)론’이다.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나 그리스·독일 학자들을 모아 강연하면 모두들 그의 주장에 화들짝 놀란다고 했다.

평소 “죽음만이 정년”이라고 외쳐 온 강 원장이지만 동서양을 통틀어 자신만이 하는 연구가 질적, 양적으로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강의를 듣는 이들 가운데 독창적으로 뭘 해 보는 이도 있고, 제가 항상 떠드는 얘기를 몇 년 뒤 스스로 깨달았다고 기뻐하는 수강생들도 있어 희망을 가져 봅니다. 하지만 이 연구를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고교 때부터 클래식을 들어 왔다는 그에게 음악 얘기를 꺼냈더니 귀 기울일 만한 답이 돌아왔다.

“음악은 시간예술이라 하지 않습니까?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은 이틀 걸려 듣잖아요? 그런데 보통 그림은 슬쩍 한 번 보고 다 봤다고 생각들 합니다. 작품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엄격한 조형의 전개 원리가 있어요. 그러므로 채색 분석을 해 봐야 조형예술 작품을 한 점 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채색 분석을 통해 조형예술 작품을 시간예술로 바꿔 놓았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2018-08-16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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