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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청년단·후퉁 신혼집… 신채호 13년 베이징 흔적이 사라진다

독립청년단·후퉁 신혼집… 신채호 13년 베이징 흔적이 사라진다

윤창수 기자
윤창수 기자
입력 2018-08-14 23:04
업데이트 2018-08-15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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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수 베이징 특파원 항일투쟁 발자취를 찾다] <하>‘신채호 루트’로 본 독립운동 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했던 독립운동가이자 걸출한 사학자였던 단재 신채호. 그의 흔적은 의외로 중국 베이징 곳곳에 새겨져 있다. 그는 1915~1928년 13년간 베이징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의 흔적이 남겨진 곳은 90여년 만에 ‘신채호 루트’로 다시 조명되고 있다. 급격한 도시화로 베이징에서 사라지는 신채호의 발자취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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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단재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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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신채호의 활동이 기록된 약 24곳의 베이징 유적지인 ‘신채호 루트’는 베이징의 구도심 얼환(二環) 등에 산재해 있다.

서울의 사대문 안과 비슷한 개념인 베이징의 구도심 얼환에는 좁은 골목길인 후퉁 수백개가 거미줄처럼 뻗어 있다. 한때 수천개에 이르렀던 후퉁은 서민들의 보금자리지만 도심 개발에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다. 단재는 1919년 베이징과 톈진의 대학생들이 무장 군사활동을 위해 조직한 ‘대한독립청년단’의 단장을 맡았다. 대한독립청년단 건물은 샤오시차오후퉁7호에 있었지만 현재는 철거돼 주소만 확인할 수 있다.

단재가 부인 박자혜와 신접살림을 꾸린 진스팡지에21호도 곧 철거될 처지다. 고층빌딩 한가운데 점처럼 박혀 있는 진스팡지에는 현재 9가구가 다닥다닥 붙어서 살고 있다. 사람 몸 하나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부엌과 작은방이 있고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전형적인 베이징의 서민 주거시설이다. 진스팡지에는 근처에 있는 병원의 증축 공사로 언제 대한독립청년단 건물처럼 헐릴지 모르는 상태다. 진스팡지에서 살고 있는 중국인 노부부는 기자의 방문에 단박 “한국인이냐”며 말을 건넸다. 단재의 흔적을 기억하려는 한국인들이 진스팡지에를 찾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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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유명 관광지인 난뤄구샹 남쪽 입구 오른쪽 첫 번째 골목인 차오더우후퉁은 단재가 1921년부터 1년 반가량 살았으며 장남 신수범이 태어난 곳이다. 신채호가 살았던 집의 번지수는 확인되지 않지만 그는 이곳에서 중국어 잡지 ‘천고’를 발행했다.
베이징의 유명 관광지인 난뤄구샹 남쪽 입구 오른쪽 첫 번째 골목인 차오더우후퉁은 단재가 1921년부터 1년 반가량 살았으며 장남 신수범이 태어난 곳이다. 신채호가 살았던 집의 번지수는 확인되지 않지만 그는 이곳에서 중국어 잡지 ‘천고’를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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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진스팡지에 21번지는 1920년 4~12월 신채호가 박자혜와 신접살림을 차린 곳이다. 벌집과 같은 이곳도 인근 병원 확장으로 언제 헐릴지 모르는 처지다.
베이징 진스팡지에 21번지는 1920년 4~12월 신채호가 박자혜와 신접살림을 차린 곳이다. 벌집과 같은 이곳도 인근 병원 확장으로 언제 헐릴지 모르는 처지다.
반면 당대의 문학가인 루쉰(魯迅)의 옛집은 단재의 신혼집에서 겨우 500m 거리에 기념관으로 잘 보존되어 대조를 이룬다. 단재는 루쉰을 비롯한 중국의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특히 베이징대 교수 리시쩡(李石曾)의 배려로 베이징대 도서관에서 고서적을 열람하며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출간할 수 있었다. 당시 베이징대 도서관은 베이다 훙루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특히 1920년 베이징대에서 중국 소설 역사를 가르쳤던 루쉰의 강의실은 칠판의 글씨까지 생생하게 재연되어 전시 중이다.

15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단재와의 결혼을 감행한 박자혜는 여성 독립운동가다. 어린 시절 아기 나인으로 입궁해 10여 년간 궁녀로 일했으며 1919년 3·1운동 당시 총독부 의원 간호사로 일하다 간호사들의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주도해 체포된다. 병원장의 신병인도로 풀려난 뒤 베이징으로 망명한 박자혜는 회문대 의예과에 입학한다. 1920년 4월 단재와의 결혼과 임신으로 학교에 다닌 기간은 일 년도 채 못 됐다.

회문대 의예과는 한국의 체 게바라로 불리는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과 고려기독교청년회를 만든 독립운동가 이용설이 수학한 곳이다. 베이징대 의예과의 전신이기도 하다. 현재는 베이징의 번화가 왕푸징 거리에서 셰허의원(協和醫院)으로 불리며 여전히 병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단재는 1910년 처음 베이징에 발을 딛는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입경 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서였다. 5년 뒤 단재를 베이징으로 이끈 사람은 일가족 전체가 전 재산을 팔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우당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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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동물원 창관루 건물은 잘 보호돼 있었지만 일제와의 무력투쟁을 결정한 군사통일주비회가 1921년 18차례나 걸쳐서 열렸다는 표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14일 동물원 역사에 대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베이징동물원 창관루 건물은 잘 보호돼 있었지만 일제와의 무력투쟁을 결정한 군사통일주비회가 1921년 18차례나 걸쳐서 열렸다는 표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14일 동물원 역사에 대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일정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관이나 싸구려 민박을 전전했던 망명객은 1918년부터 보타암과 석등암에서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며 중국 신문에 논설을 기고했다. 당시 중국 신문사로부터 받는 원고료가 수입의 전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때도 단재의 꼿꼿했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신채호는 ‘박’(博)이란 필명으로 북경중화신보에 논설 1편, 시평 101편, 평론 17편 등 모두 119편을 기고했다. 그가 쓴 글은 모두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북경중화신보 1918년 5월 19일자의 ‘정부의 변명’이란 논설에서 단재는 ‘대가안념의’(大可安念矣)란 표현을 썼다. 하지만 신문에는 ‘의’(矣)자가 ‘일소’(一笑)로 마음대로 편집되어 나갔고 바로 다음날 정정 보도가 실렸다. 필자인 단재가 한 글자를 바꾼 것에도 강력하게 항의했기 때문이다. 글자 하나를 바꾼 것은 ‘크게 안심할 수 있다’란 뜻이 ‘크게 안심하고 한번 웃을 수 있다’로 바뀐 것이라 의미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신채호의 며느리 이덕남(74) 여사는 “얼굴 한 번 뵙지 못한 시아버지의 가족관계등록부를 2009년 창설 받아 국적을 회복했지만 사망한 이의 혼인신고는 할 수 없어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법적 부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그동안 신채호는 일제가 도입한 호적제를 거부하고 무국적자의 길을 걸었기에 그의 장남 고 신수범은 어머니의 호적에 등록된 사생아로 살아야만 했다. 신채호의 국적은 회복됐지만 그의 가족관계등록부에 박자혜는 아내로 당당하게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신산한 삶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글 사진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2018-08-15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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