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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할머니 ‘증거’로 절규하다

위안부 할머니 ‘증거’로 절규하다

김기중 기자
김기중 기자
입력 2018-03-30 22:54
업데이트 2018-03-31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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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 피해자 16명 생애 구술 방식으로 서술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1·2/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연구팀 집필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 기획/푸른역사/314~320쪽/각권 1만 5000원
정진성 연구팀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견한 중국 윈난성 위안부 영상. 이는 조선인 위안부가 피사체로 잡힌 최초의 영상으로, 중국군의 심문을 받으면서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는 조선 여성 7명의 모습이 담겨 있다.  푸른역사 제공
정진성 연구팀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견한 중국 윈난성 위안부 영상. 이는 조선인 위안부가 피사체로 잡힌 최초의 영상으로, 중국군의 심문을 받으면서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는 조선 여성 7명의 모습이 담겨 있다.
푸른역사 제공
“열여섯이 되는 1940년 가을 어느 저녁이었다. 친구 집에서 놀다 돌아가는데 일본인 헌병, 조선인 헌병, 조선인 형사가 나를 불러 세웠다. 대구역에서 기차에 태워졌다. 꼬박 사흘간 달려 도착한 곳은 북만주 동안성이었다. ‘군폴’이라는 이름의 커다란 민가에 들어갔다. 스무 명 정도 되는 젊은 조선인 여성들이 있었다. 열네, 다섯 살 되는 사람도 있었다. 매일 20명에서 30명 정도 일본인 군인이 찾아왔다. 나는 매일매일 울었다. 그러나 울어도 울어도 남자들이 왔다.”(‘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본문 109쪽)

1924년 봄 대구에서 태어나 위안부로 끌려갔던 문옥주 할머니의 증언이다. ‘아버지가 길에 떨어진 보석을 줍는 꿈’을 꿔 이름이 ‘옥주’였던 귀한 딸은 영문도 모른 채 지옥을 경험해야만 했다. 문 할머니는 그렇게 북만주에서 1년을 지내고 외출 허가를 받아 가까스로 한국으로 도망쳤다. 1년 뒤 “일본군 식당에 일하러 가자”는 친구들을 따라 1942년 7월 마쓰모토라는 조선인 남자의 인솔을 받아 미얀마 랑군 만달레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군인은 그와 친구들을 보고 불쌍하다는 듯 말했다. “너희들 속아서 왔구나. 불쌍하게도. 너희는 잘못 안 거야. 여기는 ‘삐야’(위안소)야.” 울다 지쳐 잠든 밤이 밝자 군인들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다테(‘방패’의 일본어) 8400부대’에 소속된 그녀는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또다시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 체험기가 포함된 전쟁 회상록 ‘끝나지 않은 해군’(1978). 2차 세계대전 때 해군 중위로 복무했던 나카소네 전 총리는 “3000명 이상의 대부대였다. 원주민 여자를 습격하거나 도박에 빠지는 사람도 나와 고심 끝에 위안소를 만들어 줬다”고 기술했다.  푸른역사 제공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 체험기가 포함된 전쟁 회상록 ‘끝나지 않은 해군’(1978). 2차 세계대전 때 해군 중위로 복무했던 나카소네 전 총리는 “3000명 이상의 대부대였다. 원주민 여자를 습격하거나 도박에 빠지는 사람도 나와 고심 끝에 위안소를 만들어 줬다”고 기술했다.
푸른역사 제공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는 문 할머니와 같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16명의 이야기를 모은 사례집이다. 서울시가 2016년 시작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 사업’의 결과물이다.

책은 위안부 할머니를 ‘나’로 내세워 생생한 경험을 여과 없이 전하는 구술 생애 방식으로 서술했다. 피해자의 증언에 사진과 관련 자료를 덧붙여 고통스러운 경험을 구체화했다.
연합군이 입수한 일본군의 암호문서. ‘최고기밀’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힌 이 문서에는 위안소 운영을 위한 자금을 조선총독부 재무국에 요청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푸른역사 제공
연합군이 입수한 일본군의 암호문서. ‘최고기밀’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힌 이 문서에는 위안소 운영을 위한 자금을 조선총독부 재무국에 요청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푸른역사 제공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사회학과 교수) 연구팀은 지난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과 태국, 영국을 방문해 ‘위안부’ 자료들에 대한 발굴 조사를 펼쳤다. 정 교수는 “자료가 있을 만한 곳을 사전에 조사하고 현지에서 타깃을 좁히는 방식으로 미·중 연합군 공문서, 포로 심문 자료, 기록 사진, 지도 등 300여건의 가치 있는 자료들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책에 수록된 노수복, 문옥주 할머니는 지금껏 ‘증언’만 존재했지만 이번 사례집을 통해 구체적인 증거들도 제시했다.

기존 증언집이 피해 상황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뒀다면, 이번 기록은 피해자들이 끌려가고 귀환하는 과정, 귀환 이후의 삶까지 담았다.

각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동·귀환 경로를 지도로 확정하면서 일본군이 운영한 위안소가 중국, 일본, 싱가포르, 미얀마 등 아시아·태평양 전 지역에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걸 확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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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정부에 피해 등록을 하지 않은(혹은 ‘하지 못한’) 피해 할머니들 이야기도 포함했다. 이들 가운데 작고한 피해자, 중국에 살면서 국적 회복을 포기했거나 국적 회복 중 작고한 피해자, 뒤늦게 피해를 드러내고 정부 등록 과정을 진행하다 작고한 이들도 수록했다. 배봉기, 홍강림, 하복향 할머니 사례다.
위안부 피해자 보상을 위한 일본 항의 방문에서 문옥주 할머니가 꽹과리를 치며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도보 행진을 하고 있다.  푸른역사 제공
위안부 피해자 보상을 위한 일본 항의 방문에서 문옥주 할머니가 꽹과리를 치며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도보 행진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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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학순 할머니에 이어 1991년 12월 정부에 두 번째로 위안부 피해 신고를 한 문 할머니는 “친구들은 위안부였음을 밝힌 나를 비난했다”며 “이를 계기로 친구를 잃었고, 또 친구를 얻었다”고 했다. 위안부였던 사실이 알려지며 주변의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미얀마에서 지내던 당시 저금했던 돈을 일본 정부에서 돌려받기 위한 소송을 하면서, 그리고 일본에 사죄와 배상 요구를 하면서 활동가들과 또 다른 피해자들을 만나 친구가 됐다.

문 할머니는 “위안부 일을 알면서도 친구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친구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국내 최초로 위안부 피해를 증언한 후 공식적으로 등록된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는 239명이다. 30일 안점순 할머니가 별세했다. 생존자는 29명이다. 지금이 바로 우리 앞에 서 있는 그들을 돌아볼 마지막 때임은 분명하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2018-03-3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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