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성추행·성폭력… 조치·행동은 모두의 몫

입력 : ㅣ 수정 : 2018-02-0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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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
한 검사가 검찰 고위층의 성추행을 방송을 통해 폭로했다. 슬픈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데, 성추행뿐 아니라 성폭행도 여럿 있었다는 증언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진상조사단이 꾸려지긴 했지만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 여부는 막막하고, 성추행을 폭로한 피해 검사에 대한 악랄하고 치졸한 소문은 더 크고 넓게 공명되고 있다. 아무도 그렇게 믿지 않았지만, 표면적으로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목적인 검찰이 사실은 시궁창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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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Me Too) 운동이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지만 한국은 예외다. 폭로와 동시에 피해자는 사실상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기 일쑤다. 특히 성추행·성폭행 등의 사건사고에서 가해자는 당당하고, 피해자는 움츠러드는 게 한국 사회의 민낯이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출신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마리아 스토이안의 그래픽노블 ‘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를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성폭력을 당한 모든 연령대의 여자와 남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림으로 그리고 이야기를 꾸몄는데, 20개 이야기 모두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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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열다섯 살 때였다’라는 제목의 첫 번째 이야기 무대는 만원 지하철이다. 이제 열다섯 살 어린 소녀의 치마 속을 색이 다른 여러 개의 손이 더듬는다. 손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추하다. 어린 소녀는 차마 용기가 없는지 버틸 뿐이다. 만원 지하철에서 몸이 부딪치는 일이야 당연지사. 그러나 그 당연한 일들 속에서 시커먼 속내들은 자유를 느낀다. 문제는 만원 지하철에서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다양한 공간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장동석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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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동석 출판평론가

언어 폭력만큼 사람의 심장을 망가뜨리는 일도 없다. 아직 미성년자인 걸그룹 멤버들을 향해 섹시하다는 말을 칭찬처럼 내뱉는 사회, ‘꿀벅지’ ‘S라인’ 등의 해괴한 말로 관음증을 충족시키는 사회가 바로 한국이다. 남성이 길거리를 지나가는 모르는 여성을 상대로 휘파람을 불거나 ‘섹시하다’는 등 성적 발언으로 주의를 끄는 행동을 일명 ‘캣콜링’이라고 하는데, 이 캣콜링은 여성의(때론 남성의) 인격을 무참히 짓밟는다. 오죽하면 프랑스 정부가 지난해 캣콜링에 벌금을 부과하는 법안을 추진하기까지 했을까. 섹시하다는 말을 칭찬이라고 우기는 남자들은 ‘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 속에, 그리고 지금 우리 주변에 차고 넘친다.

대검찰청 자료에 따르면 데이트 폭력 피해자 절반 가까이가 가해자와 결혼하고, 다시 가정폭력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에는 데이트 폭력에 대한 이야기도 담겼는데 “너도 좋았지?”라는 가해자의 말은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하다. 언어 폭력에서 시작해 신체 폭력, 끝내 성적 폭력으로 이어지는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는 이후의 삶이 지옥일 수밖에 없다. 누구를 다시 만난다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데, 주변 사람들을 이렇게 말한다. “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

건전한 상식과 심성을 가진 독자라면 ‘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를 읽는 내내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직시해야만 한다. 그래야 “딸 같아서 만졌다”는 어이없는 소리를 더이상 뉴스에서 듣지 않을 수 있다. 저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사건은 일어났고 그들은 끔찍한 일을 경험했다. 이제 무언가 조치를 취하고 행동에 옮겨야 할 때다.” 조치와 행동은 피해자들만의 몫이 아니라 건전한 상식과 심성을 가진 우리 모두의 몫이어야 한다.

장동석 출판평론가
2018-02-03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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