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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정부의 위험한 경제현실 인식/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 교수

[시론] 정부의 위험한 경제현실 인식/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 교수

입력 2017-12-07 20:54
업데이트 2017-12-07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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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 교수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 교수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내년도 예산을 설명하는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경제에 대한 현 정부의 인식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번 국정 연설에 나타난 문 대통령의 경제현실 인식은 현실과 괴리가 매우 크다는 점에서 우려를 자아낸다.

문 대통령은 재벌 대기업 중심 경제는 정체된 성장과 고단한 국민의 삶이 증명하듯이 더이상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지 못한다며 중소기업 중심 경제, 서민 중심 경제로의 정책 전환을 주장했다. 그러나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창업 현황 보고서는 우리 경제의 문제점은 문 대통령의 인식과 정반대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2014년의 OECD 국가 기업규모별 고용통계를 보면 우리나라는 250인 이상 대규모 사업장의 고용 비중은 12.8%에 불과하고, 9인 이하 영세사업장의 고용 비중이 43.4%에 이르고 있다. 250인 이상 대형 사업장의 고용 비중이 이렇게 낮은 국가는 우리나라와 그리스뿐이다. 러시아는 70%, 미국은 60%, 일본은 50%에 달하고 대다수 유럽 선진국가들도 40% 이상의 고용을 250인 이상의 사업장이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250인 이상 고용을 창출하는 우리나라 제조업 대기업의 평균 고용 인원은 미국, 일본, 브라질에 이어 네 번째로 많고 실질임금은 벨기에에 이어 OECD 국가 중 두 번째로 높다.

문제는 이렇게 질 좋은 고용을 일으키는 대기업의 수가 너무 적다는 데 있다. 한국 기업들이 국제적 경쟁력을 갖는 ‘규모의 경제’를 만들지 못하고 영세한 상태라는 것은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이 일본의 3분의1 수준인데 기업 수는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우리나라 기업의 부가가치 생산은 미국의 7분의1 수준에 불과하다. 우리나라가 대기업 육성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은 500인 이상 고용 광공업 기업이 1987년 746개에서 최근 300개 수준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해 왔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재벌과 대기업에 대한 규제는 다방면으로 진행돼 왔다. 1986년 이후 출자총액규제, 상호출자금지, 채무보증제한 등 사전적 규제와 기업집단 공시제도 등 사후 규제, 그리고 최근 들어 일감 몰아주기 등의 행위 규제에 이르기까지 대기업 옥죄기를 지속해 왔다.

OECD 창업 보고서는 우리나라가 고용 없는 자영업자의 창업과 폐업만 활발할 뿐 고용을 만드는 기업의 창업은 극히 부진한 영세업자의 지옥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 문제의 본질은 대기업의 절대 부족과 영세 중소기업의 과도한 비중 때문인 셈이다.

문 대통령은 성실하게 하루 8시간만 일하면 먹고사는 걱정이 없는 좋은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 하지만 OECD 통계에서 우리나라 근로시간이 길게 보이는 것은 특수 시간제 근로자의 비중이 적은 데서 오는 착시현상이다.

선진국은 자투리 일자리라도 만들어 가족 구성원의 경제 참여를 높이는 방식으로 고용과 빈곤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독일의 하르츠 노동개혁은 우리 돈으로 월 40만원, 80만원의 일자리라도 자유롭게 만들어 저소득층의 빈곤화 및 복지의 비대화에 대응하고 있다. 미국의 실업률이 사상 최저 수준으로 낮아진 데는 차량 공유 서비스인 ‘우버’의 기사 등과 같은 이른바 ‘특수고용’이 큰 기여를 했다.

근로자 연평균 근로시간을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면 문 대통령이 말하는 ‘8시간의 질 좋은 고용’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것인지 알 수 있다. 2014년 기준 우리나라의 연간 근로시간이 2075시간이었던 것에 비해 실질소득이 우리나라의 2.3배인 싱가포르는 2606시간이었고 국민소득이 우리나라보다 1.5배 높은 홍콩은 2380시간, 대만은 2163시간이었다.

현실과 괴리된 인식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정책들은 필연적으로 부작용을 불러오거나 국민에게 ‘희망고문’만을 안겨 줄 뿐이다.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은 역설적으로 대통령을 비롯한 정책 당국자들의 냉철하고 정확한 경제현실 인식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2017-12-0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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