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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살리는 골목

사람 살리는 골목

정서린 기자
정서린 기자
입력 2017-11-24 17:40
업데이트 2017-11-25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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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감성 담은 골목길…창의적 인재·산업 잉태
소상공인·건물주·주민 ‘운명 공동체’로 인식 땐 사회 불평등 줄고 ‘윈윈’


골목길 자본론/모종린 지음/다산3.0/392쪽/1만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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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서민이 살아가는 공간, 해가 드는 큰길에서 볼 수 없는 생활이 숨어 있다. 고독하고 덧없는 삶도 있다. 은거의 평화도 있다. 실패와 좌절과 궁핍의 최후 보상인 태만과 무책임의 낙원도 있다. 서로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신혼살림이 있는가 하면, 목숨 건 모험에 몸을 맡기는 밀애도 있다. 골목은 좁고 짧기는 해도 풍부한 멋과 변화를 지닌 장편소설과 같다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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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탐미주의 소설가 나가이 가후가 쓴 도쿄 산책기 ‘게다를 신고 어슬렁어슬렁’의 한 대목이다. 골목을 ‘풍부한 멋과 변화를 지닌 장편소설’에 빗대는 그의 골목 찬가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마음은 어느새 정겨움과 충만함을 안겨 줬던 그 어느 날의 골목길로 이끌린다.
우리가 좋아하는 골목길이란 어떤 모습일까. 일단 단박에 걷기 좋은 곳이라는 대답이 나올 법하다. 화려하고 세련된 도심 정중앙이 꼭 아니더라도 동네의 작은 거리에서도 호기심을 당기는 ‘콘텐츠’들이 곳곳에 박힌 곳. 개성 있는 볼거리, 즐길거리, 먹을거리, 살거리가 걸음걸음마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곳, 사람과 거리와 건축물이 서로 쓰임새 있게 교류하는 곳, 차나 대로, 신호등 등이 발걸음의 호흡을 강제로 끊지 않는 곳 등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도시 재개발, 신도시 세우기로 1960년대부터 주거·쇼핑 공간의 단지화가 대세였다. 도시의 특색과 매력을 지우는 황막한 풍경에 지쳐 갈 무렵 2000년대부터 도심 곳곳의 골목상권들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홍대, 가로수길, 연남동, 연희동, 부암동, 성수동 등 서울에서만 20~30개 골목상권이 특유의 매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경주 황리단길, 전주 한옥마을, 부산 감천동 문화마을, 대구 김광석 거리 등 생기 넘치는 지방 골목상권들도 다수 생겨났다.

‘골목길 경제학자’로 불리는 모종린 연세대 교수는 이 골목들이 일으킨 변화와 힘에 주목한다. 풍요로운 골목의 기능은 단순히 치유와 즐거움에만 머무르지 않고 시민들이 다채로운 라이프스타일을 구가할 수 있는 도시문화를 제공한다는 것. 동시에 창조적인 인재와 산업을 잉태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2000년대부터 몰려든 스타트업이 200여개에 이르는 홍대의 예나 우버, 트위터, 에어비앤비, 드롭박스 등 기업들이 실리콘밸리의 대표격인 팰로앨토 대신 샌프란시스코 도심에 아예 회사를 차리는 최근 기류 등이 이를 증명한다.

때문에 저자는 골목길을 하나의 ‘자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골목길은 기억, 추억, 역사, 감성을 기록하고 신뢰, 유대, 연결, 문화를 창조하는 사회자본이라는 얘기다. 과거 도시 재개발과 신도시 건설로 산업도시를 꾀했다면, 이젠 도시재생과 골목산업 정책으로 창조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골목길 고유의 매력과 문화, 정체성을 빚어내는 주인공들은 ‘소상공인 영웅’들이다. 맛집, 독립서점, 공방, 보세가게 등 ‘거리의 장인’들은 대기업의 잘 짜인 기획으로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골목의 이야기를 짓고, 사람과 산업을 끌어들인다. 저자는 대학 입시 위주의 교육 때문에 혁신적인 기업가 정신을 지닌 창업자들이 나오기 힘든 우리 현실에서 정부가 장인대학 설립, 직업훈련, 창업 지원 시스템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영업 인재를 길러 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 통해 소상공인들의 경쟁력을 높이고 골목의 공동체 문화를 견고하게 만드는 건 젠트리피케이션(낙후됐던 구도심이 활성화되면서 임대료 상승으로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의 폐해를 막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얘기는 새겨들을 만한 대목이다. 매력적인 골목상권이 풍부한 도쿄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은 골목상권 내 건물주와 상인들 간의 공동체 문화, 일명 무라(村) 정신이 강하기 때문이다. 골목길에 더 많은 장인을 들여보내는 것, 주민이나 창업자, 자영업자, 투자자, 활동가 등 골목길의 모든 주체가 골목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는 큰 그림으로 보면 미래를 가꾸는 일이자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줄이는 실천이 될 수도 있다는 저자의 믿음에 희망을 걸어 보고 싶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2017-11-2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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