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에세이] 조직 순혈주의 타파와 행정의 효율/정재근 유엔거버넌스센터 원장, 전 행정자치부 차관, 시인

입력 : 2017-11-14 22:38 ㅣ 수정 : 2017-11-14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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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근 유엔거버넌스센터 원장, 전 행정자치부 차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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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근 유엔거버넌스센터 원장, 전 행정자치부 차관, 시인

1990년대 중반 내무부에서 서기관으로 일할 때다. 선배 중 문서 기획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사무관이 있었다. 중요한 기획이나 말씀 자료를 맡기면 팀장인 필자가 손을 많이 대어 수정해야 했기 때문에 부의 전체 일을 총괄 조정하는 주무과에 어떻게 이런 사람을 배치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서의 각 과에서 예산과 업무의 배분 등을 놓고 오래된 갈등이 표출됐다. 필자가 문제를 풀어 보려고 했지만 갈등의 타래는 더욱 얽히기만 했다. 그때 나보다 나이도 많고 오랜 근무 경력을 갖고 있던 그 선배가 해결해 보겠다고 나섰다.

그는 수차례 해당 국·과의 실무자들과 만나 논의를 하고 국·과장실을 드나드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하루 만에 합의를 이끌어 냈다. 주무과에 대한 각 과의 해묵은 서운함을 수렴하고 용감하게 간부들과 논의하더니 모두가 만족하는 대안을 도출했다. 필자에겐 ‘실제로 일을 해낸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줬다. 그 후 필자가 부서의 인력 배치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갔을 때 국·과장들은 대부분 문서 기획 능력이 좋은 인력을 요구했다. 그때마다 그 선배의 기억을 떠올리며 문서 작업만 잘하는 사람들로 모인 조직의 한계를 설명했다.

“조직은 일을 기획하는 사람 못지않게 그 일을 직접 해내는 사람이 중요하다. 일단 문서 기획에 맞춰 해야 할 일이 결정되고 나면 일의 성패는 예산을 확보하고, 이해관계자의 협의를 이끌어 내고, 국회를 설득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집행 과정에서 결정된다. 그런데 집행 과정은 주로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남을 통해 이뤄진다. 정책 성공의 이면에는 기관과 기관, 사람과 사람, 특히 공무원과 주민 사이에 문서의 왕래를 뛰어넘는 따뜻한 소통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실에서 기획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소통 능력이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리지 않는 인간다움이다.”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의 유형을 ‘과업지향적(task-oriented) 인간’과 ‘관계지향적(people-oriented) 인간’으로 대별할 수 있다. 전자는 목표를 설정하고, 업무를 배분하며, 시간을 관리하고, 자원을 동원하는 등 기획과 관련된 형태를 보이는 반면 후자는 사람을 만나 애로 사항을 청취하고, 의사결정 과정에 동료들을 참여시키는 등 소통과 관련된 행위를 많이 한다. 어느 쪽이 좋은가는 없다. 단지 다름만이 있을 뿐이다. 연구에 따르면 두 특성 모두 높은 사람이 조직에서 더 많은 성과를 거둔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두 가지 모두 뛰어난 사람, 즉 ‘일도 잘하고, 사람도 좋은’ 그런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필자는 고루 섞인 조직을 만들기를 권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국 또는 과별로 구성원의 임용 방식, 연령, 지역, 공직 경험 등을 다양화하는 것이다. 예컨대 9급, 7급, 5급 임용 공무원들을 무작위로 골고루 섞기만 해도 그 조직은 두 가지 성향의 인간이 함께 협력해 기획과 집행을 잘할 수 있다. 더욱이 9·7급 임용 공무원들은 연령과 경험의 다양화를 통해 조직을 보다 건강하고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순혈주의 타파라고 부르는 조직 구성원의 다양화는 형평의 문제를 넘어 행정의 효율성 문제다. 나아가 정부 조직에서 구성원의 다양화는 생존 그 자체다. 만약 모든 사과 농장이 돈벌이에 좋은 부사 품종만 재배하는 상황에서 치명적인 병충해가 발생한다면 사과 품종의 멸종 위기로 연결될 수 있다.

정부 조직이 논의될 때마다 개편 대상으로 논의되는 행정안전부가 여전히 생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앙·지방 인사 교류를 통해 9·7급 공채 출신 비율이 다른 중앙 부처보다 상대적으로 높고, 60% 이상이 지방 행정을 경험한 구성의 다양성으로 인해 주민과 또 지방자치단체와 잘 소통할 수 있는 공무원들이 있어서일지 모른다. 모든 정부 조직이 인사 교류를 확대하고 개방성을 강화해 생존을 뛰어넘어 어려운 일을 척척 해내는 효율적인 조직이 되기를 기대한다.
2017-11-15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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