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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 표현 빼고 점잖게”…열하일기는 후대에 어떻게 바뀌었나

“야한 표현 빼고 점잖게”…열하일기는 후대에 어떻게 바뀌었나

입력 2017-10-22 14:54
업데이트 2017-10-2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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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혈조 영남대 교수, 한국한문학회 학술대회서 발표

연암(燕巖) 박지원(1737∼1805)이 정조 4년(1780) 건륭제의 칠순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중국을 다녀온 뒤 쓴 열하일기(熱河日記)는 기행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ㆍ1737∼1805)열하일기(熱河日記)의 우리말로 번역한 필사본. 연합뉴스 자료사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ㆍ1737∼1805)열하일기(熱河日記)의 우리말로 번역한 필사본.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는 의주를 출발해 베이징을 거쳐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던 열하(熱河), 오늘날의 청더(承德)를 오간 여정을 상세히 기술했다. 또 중국에서 본 경치와 문화뿐만 아니라 토목과 건축 등에 관한 내용도 남겼다.

하지만 열하일기는 다양한 이본(異本)이 존재하고, 책들의 내용 차이도 심한 편이다. 원고가 완성되기도 전에 각 편이 필사돼 유통됐고, 이 과정에서 필사자의 성향과 기호에 따라 글이 조금씩 수정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혈조 영남대 교수는 한국한문학회가 21일 성균관대에서 ‘검열과 비판’을 주제로 연 학술대회에서 이가원 선생 소장본과 고려대 소장본 등 초고본 계열과 1932년 박영철이 활자로 간행한 박영철본을 비교한 결과를 발표했다.

김 교수는 초고본 계열과 박영철본의 차이로 명과 청에 대한 표현을 들었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명을 숭상했지만, 당시는 만주족이 황제인 청대였다.

연암은 명과 청의 국호나 연호를 쓸 때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적었지만, 박영철본은 청에 대한 표현은 격을 낮추고 명은 높였다. 예컨대 초고본 계열의 ‘성청’(聖淸)은 박영철본에서 ‘상국’(上國)으로 바뀌었다. 또 초고본 계열에는 없는 ‘황명’(皇明)이라는 존칭 접두사가 박영철본에는 수차례 삽입됐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망한 지 150년이나 지난 명나라를 오매불망하고 책에서조차 극존칭을 쓰는 형태로 개작하는 태도는 숭명반청 이데올로기가 빚은 시대착오적 허위의식의 소산”이라고 비판했다.

박영철본의 또 다른 특징은 초고본 계열에 있는 여성에 대한 묘사나 야한 표현의 수위를 낮추고 점잖게 보이도록 고쳤다는 점이다.

열하일기 초고본 계열에는 한족과 만주족 여성에 대한 묘사가 자주 나오고, 연암이 여성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훔쳐보았다는 대목도 있다. 그러나 박영철본에는 성적 표현에 대해 상당한 수정이 가해졌다.

김 교수는 초고본 계열에 있는 ‘한동안 일부러 재를 뒤척이며 그 부인을 훑어보았다’는 문장이 박영철본에서 ‘그 여인의 복식 제도를 구경하였다’로 변경됐다고 지적하면서 “도덕적 체면이라는 거름망을 피하지 못하고 다른 내용이나 표현으로 교체됐다”고 주장했다.

박영철본의 이 같은 수정 방향은 양반의 체통과 관련한 내용에서도 확인된다. 김 교수는 초고본 계열에서는 연암이 양반의 체통과 법도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소탈한 면모를 보이는데, 필사본과 박영철본은 연암을 아주 근엄하고 고답적인 인간 유형으로 만들어놓았다고 강조했다.

일례로 연암이 일행과 방 안에서 한 놀이인 투전(紙牌)을 바둑(圍碁)으로 바꿨고, 말하는 대화체에서도 양반과 역관의 신분 차별을 더욱 도드라지게 수정했다.

아울러 김 교수는 “연암의 문체는 이두를 사용하고 성인과 임금의 이름에 들어가는 글자를 쓰지 않는 피휘(避諱)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추하고 버릇없는 글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면서 “연암은 이러한 문체를 통해 생생하고 역동적인 기운을 얻었다고 자부했는데, 후대의 필사본은 이를 정통 고문으로 바꿨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연암도 스스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일부 내용을 수정했지만, 후대의 필사본은 본래의 모습에서 점점 멀어지는 쪽으로 변했다”며 초고본 계열에서 많이 달라진 박영철본은 문인 지식층의 자기 검열의 결과이자 개악이라고 평가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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