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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천에서 내려오는 학도의용대입니다”

“우리는 인천에서 내려오는 학도의용대입니다”

입력 2017-06-29 16:52
업데이트 2017-06-29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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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창립과 활동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4)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임시로 탈영병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아들 이규원(인천 소재 치과 원장) 씨의 도움으로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 1명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는 부산까지 걸어가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000명과 참전 스승(심선택 소위, 신봉순 대위)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 소위·24세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권유상 인터뷰

●일시 1998년 1월 19일

●장소 인천 부평외국어고등학교 교장실

●대담 권유상

이경종(6·25 편찬위원)

이규원(6·25 편찬위원장·이경종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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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대신동 동신국민학교에 있었던 육군통신학교에서 인천 지역의 중학교 2·3학년 출신(1951년 1월 10일 부산에서 자원입대) 통신병들이 3개월간 무선통신 교육을 받고 3기로 졸업하며 찍은 참전 기념사진. 사진 앞줄 가운데 미군 고문관 사이에 앉아 있는 한국 군인이 조응천 육군통신학교 교장. 1951년 4월 28일 촬영.
부산 동대신동 동신국민학교에 있었던 육군통신학교에서 인천 지역의 중학교 2·3학년 출신(1951년 1월 10일 부산에서 자원입대) 통신병들이 3개월간 무선통신 교육을 받고 3기로 졸업하며 찍은 참전 기념사진. 사진 앞줄 가운데 미군 고문관 사이에 앉아 있는 한국 군인이 조응천 육군통신학교 교장. 1951년 4월 28일 촬영.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1회]

■권유상
인천학도의용대 제3대대장
서울대 사범대학 2학년생
1953년 5월 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 92정보 통신대에 근무할 당시 권유상.
1953년 5월 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 92정보 통신대에 근무할 당시 권유상.
1928년 12월 21일: 인천 화수동 출생

1942년: 인천송림국민학교 5회 졸업

1948년: 인천공업중학교 졸업 후 서울대학교 입학

1950년 9월 20일: 인천학도의용대 제3대대장 취임

1950년 12월 18일: 경남 통영의 국민방위군 제3 수용소를 향해 남하

1951년 1월 10일: 국민방위군 사건을 듣고 최종목적지를 통영 국민방위군 제3 수용소에서 부산의 육군 제2 훈련소로 변경

1951년 1월 15일: 23살의 서울대학교 2학년 학생이어서 육군 중위 장교임관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중학생들과 같이 사병으로 자원입대

1956년 2월 25일: 5년 1개월을 복무하고 만기 제대

#나와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

1928년 12월 21일 인천 화수동 147번지에서 태어난 나(권유상)는 인천송림국민학교와 인천공업중학교(현 인천기계공고)를 졸업했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인 때 6·25 사변이 일어났다.

9·15 인천상륙작전 후 인천지역은 북한 인민군치하에서 학정에 시달리던 우익학생들이 모여서 인천학도의용대를 만들어 활동 중이었고 그 본부는 용동에 있었다.

1950년 9월 20일쯤 인천학도의용대에서 나를 3대대장으로 임명하여 나는 인천주안국민학교를 대대본부로 정하였다. 우리 3대대 구역은 남구, 남동구, 연수구였고 대원은 약 1000명이었다. 우리 3대대의 대대부관은 인천공업중학교 4학년 조태휘였고 1중대장은 인천상업중학교 6학년 권용훈, 2중대장은 인천중학교 6학년 이용구, 3중대장은 고려대학교 2학년 최수보였다.

#국민방위군 소위를 따라 통영을 향해서 남하

1950년 11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UN군이 밀린다는 소문이 들렸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의 전 대원 3000여명이 인천축현국민학교에 모두 모여서 인천 병사구 사령부(현재 병무청)에서 파견 나온 국민방위군 소위의 인도에 따라 경상남도 통영의 충렬국민학교(국민방위군 제3수용소)를 목표로 남하 행진을 시작했다.

그 날은 함박눈이 왔고 국도를 따라서 수원, 대전, 대구, 청도, 밀양, 삼랑진을 거쳐 통영의 충렬국민학교를 향하여 매일 25㎞(동인천역에서 영등포역 거리 정도)씩 20일간 500㎞ 거리를 인천지역의 6년제 중학교 학생들 약 3000명이 대학생 형들을 따라 도보로 남하했다.

#“우리는 인천학도의용대입니다”

우리 인천학도의용대는 걸어서 내려가다가 밤이 되면 농업조합(당시 농민을 위한 기관)을 찾아가 “우리는 인천에서 남하하는 학도의용대입니다”라고 신분을 밝히면 밥을 해 주고 잠자리를 마련해줬다.

우리는 인천을 떠난 지 20일 만에 최종 목적지 국민방위군 제3 수용소에 가까운 마산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나는 국민방위군 사건을 보고 통영 국민방위군 제3 수용소로 가는 걸 주저한 채 마산에 있으면서 인천학도의용대(대장 이계송) 본부에 보고했다.

#국민방위군과 국민방위군 사건

전시에 신속한 병력 동원을 위해 1950년 12월 제정한 국민방위군법에 의한 군대였으나 1951년 1·4 후퇴 때 국민방위군 약 9만명이 굶거나 얼어서 죽은 사건이 발생하여 관련 장성 5명이 총살당했고 국민방위군은 1951년 5월에 해체되었다.

#“고향 인천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라”

1951년 1월 초 우리 3대대 부관 조태휘가 나에게 마산의 해병대 6기 모집에 관하여 보고했다. 대부분의 우리 3대대 대원들이 해병대에 지원했고 해병 신체검사가 끝난 후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6기 해병대원은 대부분 인천 지역 6년제 중학교 4~6학년 학생들이었다.

나는 우리 3대대의 합격자들에게 “해병대에 가더라도 인천학도의용대의 긍지를 잊지 마라. 그리고 다시 고향 인천에서 만날 때까지 모두 건강하라”는 당부의 말을 하였다.

#해병6기는 거의 인천출신 중학교 4~6학년 학생

그때 해병 6기 모집에 합격한 대원은 6년제 중학교 4~6학년 학생들이었고 탈락한 대원들은 2·3학년 학생들이었다. 그때 나도 해병대로 자원입대할까도 생각했지만 나이가 어리거나 작아서 탈락한 대원들 때문에 도저히 해병대에 입대할 수 없었다.

탈락한 어린 대원들이 우리를 버리지 말라는 아우성에 나는 “너희들과 같이 행동 할 테니 우리 다 같이 어려운 고비를 함께 넘기자”며 어린 중학생들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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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봉순 대위가 6·25 사변 때 부산에서 오갈 데 없었던 인천학도의용대 여학생 대원들을 부산육군통신학교에서 행정보조요원으로 3개월간 보호하고 있다가 고향 인천이 수복된 후 귀향시킬 준비를 마치고 기념으로 찍은 사진. 원안 인물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석명숙(당시 인천여중 6학년), 조인호(박문여중 5학년), 주인숙(인천여상 4학년), 이은영(인천여중 3학년), 한영희(인천여상 3학년), 이인숙(인천여중 1학년). 1951년 3월 20일 부산육군통신학교 유선교육대 정문 앞에서 촬영.
신봉순 대위가 6·25 사변 때 부산에서 오갈 데 없었던 인천학도의용대 여학생 대원들을 부산육군통신학교에서 행정보조요원으로 3개월간 보호하고 있다가 고향 인천이 수복된 후 귀향시킬 준비를 마치고 기념으로 찍은 사진. 원안 인물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석명숙(당시 인천여중 6학년), 조인호(박문여중 5학년), 주인숙(인천여상 4학년), 이은영(인천여중 3학년), 한영희(인천여상 3학년), 이인숙(인천여중 1학년). 1951년 3월 20일 부산육군통신학교 유선교육대 정문 앞에서 촬영.
#중학교 2·3학년 학생들이 갑자기 군인으로

통영 국민방위군 제3 수용소로 향하던 인천학도의용대는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인하여 부산 육군 제2 훈련소로 입소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고 우리들은 마산항에서 배를 타고 약 8시간 걸려 부산항에 도착하여 육군 제2 훈련소에 1951년 1월 10일 날 입소했다.

부산진국민학교에 있었던 육군 제2 훈련소에 입소한 날부터 인천학도의용대란 존재는 사라졌고 갑자기 중학생에서 군인이 되었다.

그 후 부산 동대신동 육군통신학교로 가라 해서 많은 인천지역 중학교 2·3학년 학생들이 나를 포함하여 통신병 교육을 받고 통신병이 되었다.

#인천 여학생들의 은인, 신봉순 대위님

인천에서부터 부산까지 같이 내려왔던 많은 여학생 대원들은 오갈 데가 없어서 매우 어려웠었다. 그때 부산육군통신학교의 신봉순 대위님은 여학생들을 통신학교 행정보조 업무를 하게 하며 보살폈고 4개월 뒤 여학생들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문산에서 전사(1952년 6월 12일)한 이중수의 묘를 참배하고 있는 삼부자. 왼쪽부터 이경종(현 6·25 편찬위원), 이근표(현 인천학생 6·25 참전관장·이경종 큰손자), 이규원(현 6·25 편찬위원장·이경종 큰아들). 1997년 2월 16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촬영.
문산에서 전사(1952년 6월 12일)한 이중수의 묘를 참배하고 있는 삼부자. 왼쪽부터 이경종(현 6·25 편찬위원), 이근표(현 인천학생 6·25 참전관장·이경종 큰손자), 이규원(현 6·25 편찬위원장·이경종 큰아들). 1997년 2월 16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촬영.
#중학교 2·3학년 학생들이 통신병으로

신봉순 대위님은 8·15 해방 후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시다가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고 장교로 임관하여 부산육군통신학교 유선교육대장으로 있었는데 많은 인천학생들을 통신학교로 입교시켰다.

신 대위님은 지휘관 옆에 있는 통신병이 좀 더 안전할 거라는 생각에 어린 중학생들을 통신병으로 이끌어 주셨다.

#“우리 대대장님 누룽지 드세요”

어느 날, 여학생 몇 명이 누룽지를 가져와서 ‘대대장님 드세요’라고 했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렇듯 서로를 감싸주고 생각해주는 따뜻한 마음들은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아직까지도 나의 가슴에 남아 있다.

#육군 중위 장교임관을 거절하고 사병으로 입대

1951년 1월 10일 나는 육군 중위 장교임관 제의를 거절하고 어린 중학생들과 함께 사병으로 자원입대하여 참전하였고 1956년 2월 만기 제대하였다.

국가위난의 6·25때 나라를 지키겠다고 뭉친 인천의 6년제 중학교 학생들은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자원 입대 후 참전하여 청춘을 채 펴 보지도 못하고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을 전선에서 보냈다.

#“내가 이끌었던 3대대 대원들도 많이 전사”

그때 나는 대학생이었고 인천학도의용대 3대대장으로서 어린 중학생들을 인천에서 부산까지 내 나름대로 판단하여 한 점 부끄럼 없이 이끌었지만 너무나 큰 국가 위기로 인하여 내가 할 수 있는 힘의 한계는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 3대대 1000명 중에서 100명 정도 전사했다는데 시국이 너무 급박하여 형으로서, 대대장으로서 할 일을 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아직까지도 한(恨)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있다. 아무쪼록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 역사 발굴 작업이 성공하기를 빈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다음 호에 2회 계속

참전기 1회를 마치며…

●이경종 위원이 전하는 말

권유상 옹은 육군 중위 장교임관 제의를 거절하고 어린 중학생들과 함께 23살에 사병으로 자원입대하여 5년 후 28살에 만기 제대한 인천지역 어린 중학생들의 훌륭한 형이었다.

●이규원 위원장이 전하는 말

살아 계시다면 올해 90살이 되신 권유상 인천학도의용대 3대대장님께 감사의 말씀 드린다.

1·4 후퇴 때 인천에 남아있었으면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실종되거나, 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가서 굶거나 얼어 죽을 운명의 인천학생들을 안전하게 부산까지 이끌어서 훌륭한 일을 해냈다. 하지만 208명이 전사하여 제대 후 고향 인천에서 전사 학생 부모님들로부터 “우리 아들 전쟁터 데려가서 죽었다”라는 비탄의 말을 들었고, 일평생 동안 동생 같았던 전사 학생들을 가슴에 담고 살았던 참전 대학생 형들이 인천에 있었다.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던 저의 아버지(이경종)를 안전하게 부산까지 이끌어주신 권유상 3대대장님께 지면으로나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7-06-30 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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