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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주 세상 속 수학] 천재들의 브로맨스

[박형주 세상 속 수학] 천재들의 브로맨스

입력 2017-04-18 22:28
업데이트 2017-04-19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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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런던에서 만개를 앞둔 봄꽃을 보며 잠시 망중한을 누린 런던대학 근처의 공원 이름은 러셀 광장이었다. 이 공원 옆 드모르간 하우스는 수학적 귀납법을 체계화한 영국 수학자의 이름을 땄다. 이 건물의 주인은 런던수학회이고 건물 안에서 가장 큰 회의실은 하디 룸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러셀과 하디라는 두 이름을 한 골목에서 보는 호사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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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주 아주대 석좌교수
박형주 아주대 석좌교수
하디는 최근 개봉됐던 영화 ‘무한대를 본 남자’에서 인도 수학 천재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친구로 나와 국내에 알려졌다. 인도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며 교육도 변변히 받지 못한 라마누잔을 케임브리지대학에 초청해 천재성을 꽃피게 해 준 바로 그 사람이다. 하디 자신도 수학적 엄격함을 영국에 도입한 훌륭한 수학자였지만, 자기 평생의 가장 큰 성취는 라마누잔을 발견한 것이었다고 털어놓곤 했다. 그래서 천재와 교수의 브로맨스를 다루는 이 영화는 맷 데이먼이 주연한 영화 ‘굿 윌 헌팅’의 실화 버전에 가깝다.

버트런드 러셀은 할아버지가 영국 총리를 두 번 역임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비유클리드 기하학 논문을 쓴 수학자였고, 칸토르 집합론의 한계를 넘기 위해 러셀 패러독스를 창안한 논리학자였으며, 화이트헤드와 함께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를 저술한 철학자였다. 하지만 정작 그의 1950년 노벨상은 정력적인 저술 작업에 대한 문학상이었다.

러셀과 하디와 라마누잔은 5년의 기간 동안 영국에서 여러 갈래로 얽힌다. 라마누잔이 인도를 떠나 케임브리지에 도착한 건 1914년이었고 박사 학위를 받은 건 1916년, 영국왕립학회의 역사상 최연소 펠로로 선출된 건 1918년인데 같은 해에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가 됐다. 교수가 된 것이다. 러셀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평화운동을 벌이다 1916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 교수 직에서 해임됐다. 하디는 러셀 구명 운동에 나서지만, 결국 라마누잔이 1919년에 인도로 돌아가자 옥스퍼드로 자리를 옮긴다. 하디가 트리니티를 떠난 이유는 분명치 않다. 러셀이 없는 곳, 라마누잔도 떠난 곳에 더 머무르기 싫어서였을까. 하지만 1931년에 하디는 케임브리지 교수로 되돌아간다.

런던수학회는 왜 학회 건물에서 가장 큰 방을 하디 룸이라고 했을까. 대개 학문 분야에서는 학자들의 결사체가 있어서 학문적 진전의 확인과 기록, 그리고 난제 해결을 위한 생각의 교환 매체 역할을 한다. 수많은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논문지를 발간해서 우리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정리하고 드러낸다. 보통은 각 나라 수학자들의 모임이라는 성격 때문에 미국수학회나 대한수학회처럼 국가 이름이 앞에 붙는다.

반면에 영국은 런던수학회나 에든버러수학회같이 도시명이 붙은 수학회가 몇 개 있다. 오랜 영연방 역사의 산물인데, 통상적으론 런던수학회가 영국수학회 역할을 한다. 하디는 70세의 나이로 1947년 사망할 때까지 독신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재산을 런던수학회에 기부했다. 덕분에 수학자들이 내는 연회비에 의존해서 근근이 살림을 꾸려 나가던 런던수학회는 건물을 샀고 건물 내 일부 공간을 타 학회에 대여해 안정된 재정 구조를 가질 수 있게 됐다. 학술지 발간 등의 활동에서 세계적으로 드문 규모와 수준으로 성장하는 동력이 됐음은 물론이다.

런던의 어느 작은 골목에서 본 학자들의 선의와 지적 우정의 흔적은 러셀 광장의 봄꽃만큼이나 여운이 남았다.
2017-04-1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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