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페이지

[서울광장] 박경리가 살아 돌아와도/황수정 논설위원

[서울광장] 박경리가 살아 돌아와도/황수정 논설위원

황수정 기자
황수정 기자
입력 2017-02-03 22:44
업데이트 2017-02-04 00:01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이미지 확대
황수정 편집국 부국장
황수정 편집국 부국장
북악산 길을 달리다 성북동으로 잠시만 꺾어 내려가면 수연산방이 있다. 길가의 큰 신식 건물에 가려졌지만 한 번 본 사람은 조촐하게 돌아앉은 솟을대문을 잊지 못한다. 월북 작가 상허 이태준(1904~?)의 옛집이다. 그가 월북하기 전 13년을 살며 글을 썼던 고택은 지금 전통찻집이다. 작가의 외손녀가 할아버지의 옛집을 물려받아 길손들에게 대추차며 호박범벅을 내놓고 있다.

상허의 집에서 상허의 수필집 ‘무서록’을 읽는다. 그 맛의 깊이와 향을 나는 말로 다 표현할 재간이 없다. 열두 자도 넘는 파초 아래 의자를 놓고 남국의 정조를 명상했을 누마루 앞 뜨락(‘파초’), 아침마다 이를 닦으며 안마당에서 한참 쳐다봤다는 건너편 산마루의 성곽(‘성’), 가을밤 불벌레 부딪는 소리가 째릉째릉 울렸다는 창호지 발린 미닫이문(‘가을꽃’)…. 칠십 년이 넘은 작품 속 공간들이 도처에 생생해서 눈이 고단할 지경이다. 그런 즐거움에 나는 ‘무서록’을 또 읽는다.

알량한 개인 취미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작가의 정신과 훈기를 쬐는 일이 문학을 받아들이는 데 얼마나 중요한 동기인지를 말하고 싶어서다.

올해 대학에 들어간 지인들의 딸 둘이 모두 수능시험날 첫 교시 국어 영역에서 울어 버렸다고 했다. 국어 문제가 어쨌기에, 일껏 챙겨 봤다. 보험의 경제학적 원리를 설명한 지문은 시험지 한 면을 꽉 채웠다. 인터넷의 짧은 글에만 익숙한 요즘 아이들에게는 숨이 막혔을밖에. 문학 부문에서는 더 했다. 박경리의 1964년 장편소설 ‘시장과 전장’, 그보다 더 오래된 김수영의 시 ‘구름의 파수병’을 복병처럼 맞닥뜨리고는 눈물이 쏙 빠졌을 것이다.

박경리와 김수영이 누군가. 모국어의 절정을 구사한 작가들이다. 스무 살 언저리의 우리 청춘들이 가장 순도 높은 모국어 앞에서 좌절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썰렁해진다. 생활기록부에 몇 자 기록할 ‘기획 도서’ 말고는 독서에 담을 쌓게 하는 것이 교육 현실이다. 그러면서 대하소설급의 박경리 장편을 입시에 들이미는 발상부터 따져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읽고 분석하는 능력을 저울질한다지만, 애초에 그런 직관은 평가의 대상일 수 없다. 우리 글에 질려 십리 바깥으로 도망가게 몰아세우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된다.

딸아이가 다니는 학원의 도서실 서가를 가끔 얼쩡거린다. 한복판에 박경리의 21권짜리 대하소설 ‘토지’ 전집이 꽂혀 있다. 중고생들이 이 책을 읽느냐고 물었다가 “손도 안 댄다”는 대답에 혼자 웃고 만 적이 있다. 다음 순간 들은 말을 그래도 오래 위안 삼는다. “박경리 이름 석 자는 기억하겠지요.” 그날로 나는 ‘토지’를 다시 읽고 있다. 누군가 빌려 보는 흔적을 남겨 줘야 전집이 자리를 지키지 싶어서.

당장 읽지 않아도 책의 훈기를 쐬는 것은 단단하고 소중한 일이다. 문학을 접할 현실적 여유가 없고, 문학과 어떻게 친해져야 하는지 방법도 모르는 청소년들에게는 더욱이 그렇다. 최근 인기 드라마 ‘도깨비’에 나온 시집이 하루아침에 베스트셀러로 뜬 이유이기도 하다. 동기와 방법의 오솔길에 등불만 켜 주면 사람들은 읽고 느낄 준비가 돼 있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허송세월은 그래서 자꾸 기가 막히다. ‘최순실 예산’을 집행하는 데나 정신이 뺏겨 그 흔한 책 읽기 캠페인 한번 하지 않고 4년간 도낏자루만 썩였다. 블랙리스트가 아니더라도 할 일은 산처럼 많았다.

산문의 최고봉인 이태준만 놓고 보자. 1992년 상허학회가 결성되고 재작년에야 가까스로 7권짜리 전집이 나왔다. 초쇄로 찍은 700질의 절반 이상이 아직 출판사 창고에 쟁여져 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조차 전집을 온전히 다 볼 수 없다. 이러다가는 절판이 시간문제일지 모른다. 올해 문체부의 출판산업 육성 예산은 191억원. 부처 예산의 1%도 안 되는 돈이다. 세종도서 선정 사업비는 그중에서도 얼마일지 민망해서 알고 싶지도 않다.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오래된 우리 작가들의 처지는 해가 갈수록 초라하다. 기억해 주지 않으면 작가는 박물관의 역사가 된다. 먼지 산을 뒤집어쓰더라도 시중 서가 곳곳에 이태준, 김수영, 박경리, 이문구가 버티게 해야 한다. 정책의 지원이 필수다. 그러지 않으면 박경리가 살아 돌아온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정말 겁나는 일이다.

sjh@seoul.co.kr
2017-02-04 23면

많이 본 뉴스

의료공백 해법, 지금 선택은?
심각한 의료공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의대 증원을 강행하는 정부와 정책 백지화를 요구하는 의료계가 ‘강대강’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사회적 협의체를 만들어 대화를 시작한다
의대 정원 증원을 유예하고 대화한다
정부가 전공의 처벌 절차부터 중단한다
의료계가 사직을 유예하고 대화에 나선다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