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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던… 조선시대 ‘서얼’의 피눈물이 고스란히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던… 조선시대 ‘서얼’의 피눈물이 고스란히

안동환 기자
안동환 기자
입력 2017-01-17 20:58
업데이트 2017-01-17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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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 ‘통색촬요’ 첫 번역 출간

조선은 중국이나 고려와 달리 양반이 첩으로부터 얻은 자식인 ‘서얼’을 지독히 차별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본처 형제를 형·동생이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전’ 그대로다. 그중에서도 혹독했던 건 조선에만 존재했던 서얼의 과거 응시를 금지한 ‘서얼금고법’이다. 이는 정도전과 권력을 다퉜던 태종이 재위 15년이던 1415년 ‘서얼 자손은 현직에 서용하지 말라’고 명한 데서 유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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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양반사회 소수자인 서얼들의 차별과의 투쟁이 기록된 ‘통색촬요’(通塞撮要)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처음으로 번역돼 출간됐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한 유일본으로, 익명의 서얼 학자들이 ‘허통’(許通)의 역사를 쓴 것이다. 금고법(禁錮法)을 풀어 서얼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한 제도가 허통이다.

역대 조선 국왕 중 서얼들이 가장 기대했던 임금은 영조였다.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 소생으로, 서얼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영조 1년(1725) 서얼 진사 정진교를 대표로 260명이 연명 상소를 올렸지만 도승지가 수령을 거부했다. 영조는 정치적 입지가 굳건해진 재위 48년부터 서얼 폐단을 혁파하려고 했지만 기득권의 저항도 컸다. 영조 49년(1773)에는 왕이 서얼 출신 무관을 선전관에 임명하자 책임자인 당상 선전관이 국왕의 지시를 거부하는 항명 사태가 벌어졌다. 그 이후에도 국왕 면전에서 허통 지시를 거부하는 사태가 빈번했다.

영조를 계승한 정조는 노론 중심의 문벌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서얼을 적극 등용했다. 정조가 재위 첫해(1777)에 내린 전교에는 “아, 저들 서얼도 나의 신하인데 제자리를 얻지 못하고 그 포부를 펼칠 수 없게 한다면 이 또한 과인의 잘못”이라는 안타까운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대표적 실학자인 박제가를 비롯해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은 모두 서얼 출신으로 규장각 검서관을 맡았다. 하지만 정조가 급서한 후 서얼에 대한 차별은 다시 심해졌고,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그들만의 세도정치를 이어갔다.

김성우 대구한의대 역사학과 교수는 해제에서 “서얼 학자들은 서얼의 억울함이 풀리고 재능을 인정받을 수 있기를 염원하며 이 책을 썼지만 결과적으로 영·정조대 이후 비참해진 서얼 출신 문사들의 피눈물이 담긴 기록이 됐다”고 평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2017-01-18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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