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노대복 69세, 마을버스기사
양옥화 67세, 노대복의 아내
노운수 45세, 노대복·양옥화의 아들, 택시기사
노만석 22세, 노운수의 아들, 퀵서비스맨
때
어느 가을 토요일 저녁
장소
한눈에도 오래되고 허름해 보이는 집의 거실이다. 거실 벽은 얇은 나무합판으로 둘러쳐져 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거나 나무합판이 삐져나온 곳이 보인다. 가구나 테이블, 가전제품, 주방의 싱크대 등에도 오랫동안 사용한 흔적이 역력하다.
무대 뒤쪽은 주방이다. 싱크대와 냉장고 등이 있고, 냉장고 앞에 식탁으로 사용하는 원목 탁자가 있다. 주방 오른쪽으로는 미닫이문이 있고, 이 문을 나가 좁고 긴 복도를 따라가면 현관문이 나온다(객석에서 현관문은 보이지 않는다). 미닫이문 오른쪽 벽에는 커다란 전신 거울이 걸려 있고, 그 바로 옆은 노만석의 방이다.
주방 왼쪽으로는 뒷마당으로 바로 연결되는, 스테인리스로 된 문이 있다. 뒷마당에는 양옥화가 가꾸는 텃밭이 있다. 파나 고추 같은 것들을 키운다. 바로 옆에 방문이 있고(노운수의 방), 그 옆에 또 하나의 문이 있다. 이곳은 욕실 겸 화장실이다. 그리고 그 옆으로 또 하나의 방문이 있다(노대복, 양옥화의 방). 방문이 마치 이 집 인테리어의 전부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 외의 특별한 건 보이지 않는다. 흔한 액자조차 벽에 걸려 있지 않다.
무대 앞쪽에는 온 가족이 앉을 수 있는 패브릭 소파가 객석을 향해 디귿자로 배치되어 있고 담요 같은 것들이 걸쳐져 있다. 왼쪽 소파에는 마른 빨랫감들이 아무렇게 놓여 있다. 가운데에는 테이블이 놓여 있고 꽃병이 있다. 테이블은 나무의 밑동을 잘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이 역시 오래돼 보인다.
무대 밝아지면 대복, 방문을 열고 등장한다. 주방을 어슬렁거리며 뭔가를 찾고 있다. 잠시 후 뭘 찾는지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 기억이 났는지 서랍장을 뒤져 손톱깎이를 찾아 소파 쪽으로 온다.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려놓는다. 자신의 발을 불만스러운 듯 이리저리 살피는 대복. 한참을 들여다보다 깎기 시작한다. 통증이 있는지 간간이 허리를 펴고 심호흡을 한다. 동작을 반복하다 신경질이 나는지 손톱깎이를 옆 소파에 던져 버린다.
대복 빌어먹을! 발가락을 뽑아내든가 해야지.
소파에 드러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손톱깎이를 찾는다. 다시 발톱을 깎기 시작하는 대복. 곧바로 미닫이문이 열리고 휘파람을 불며 운수 등장한다. 무스로 정돈한 올백 머리, 알이 큰 선글라스를 쓰고, 동선운수라고 쓰인 택시회사의 제복을 입고 있다. 거울을 보며 한껏 폼을 잡는 운수. 그런 모습을 한심한 듯 쳐다보는 대복. 잠시 후 둘의 눈이 마주친다. 과장되게 인사를 건네는 운수.
운수 그간 옥체 건강하셨습니까?
대복 누구?
운수 저는 그러니까, 아들입니다.
대복 그런 이름은 내 머릿속엔 없는데. 여긴 어떻게? 분명 문을 걸어 잠갔는데.
운수 수척해 보이십니다, 아버님. 들어가서 쉬시지요. (혼잣말처럼, 하지만 대복에게도 들릴 정도로 크게) 큰일이야, 빨리 기억이 돌아와야 할 텐데.
대복 뽑아낼 게 있는데 뽑아낼 수가 없네요. 어째야 합니까, 하나님.
운수 하나님은 바쁘셔서 그런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대복 쑤욱, 하고 뽑혀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운수 세상에 있는 건 다 있을 만한 이유가 있어섭니다. 마음에 평안을 찾으시지요.
대복 실수를 하셨습니다. 아주 큰 실수를 하셨어요, 하나님. (발톱에 통증을 느끼는지 인상을 찡그린다)
운수 병원엘 가세요. 왜 가만히 두고 병을 키워요?
대복 내 병을 키우는 건 네놈이다, 이 망할 자식아.
운수 또, 또 그러신다. 혈압도 높은 양반이.
대복 어디 가서 뭘 했기에 이제야 기어들어오는 거냐?
운수 뭘 하긴요, 일했죠.
대복 네놈이 야간조인 건 너만 모르고 우리 가족이 다 알아.
운수 일 끝나고 피곤해서 그냥 회사 근처에서 잤습니다.
대복 걸어서 이십 분이면 오는 너의 회사 말이냐?
운수 밤새 운전만 하면 다리가 부어요. 천근만근입니다.
대복 그래, 알지 알아. 나도 사십 년을 운전만 해서 발톱이 이 모양이지. 보이냐? (발을 들어 운수 쪽으로 내민다) 얼빠진 놈. 대체 언제 정신을 차리려고.
운수 그만하세요. 저도 낼모레면 오십이에요.
대복 아유,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겨우 칠십밖에 처먹지 않아서.
운수 먹을 만큼 먹었다는 거죠.
대복 어디서 같잖게 나이 타령이야?
운수 조심하세요. 곧 터집니다, 제 인생에 잭팟이. 뒷일, 감당할 수 있으시겠어요?
대복 감당 못해도 좋으니 제발 좀 터져다오 그놈의 잭팟.
운수 두고 보세요. (거울을 보며 머리를 다듬는다)
대복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발톱을 깎기 시작한다) 어디 이름 모를 강에 가서 돌 껴안고 뛰어들든가 해야지.
운수 (소파에 앉으며) 그 의사 새끼 그거 돌팔이였나봐요. 수술한 지 얼마 됐다고 또 그래요?
대복 내성발톱이란 게 원래 그렇다.
운수 원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요즘 같은 세상에.
대복 내 자식도 내 맘처럼 안 되는데, 뭔들 되겠냐?
운수 이 자식새끼는 자나깨나 아버님, 어머님 생각뿐입니다.
대복 자나깨나 노름 생각뿐이겠지.
운수 노름이라뇨. 친, 목, 도, 모. 남들이 오해하겠어요.
대복 그래. 하룻밤에 몇 백만 원이 오가는 친목도모.
운수 전 아니에요. 그런 돈도 없고.
대복 얼마나 다행이냐, 네놈이 개털인 게.
운수 총알만 있으면. (대복의 험악한 얼굴을 보고) 농담이에요, 농담.
대복 네 엄마 한 번 더 쓰러지면 네 귓구멍에 총알을 박아주마.
운수 말씀 한번 살벌하십니다.
대복 이 집의 절반이 아직도 은행 거라는 것도 잊지 않았겠지, 응? 내가 평생을 일해 장만한 이 집 말이야,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51-23번지!
운수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요. 느낌이 와요. 운의 바람이 저한테 불어오고 있다고요.
대복 여기 죄 많은 노름꾼 하나가 정신 못 차리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회개할 수 있게 정수리에 번개라도 내리쳐 주세요.
운수 요즘엔 말이죠, 상대가 어떤 패를 들었는지가 보여요.
대복 세 치 혀로 거짓을 일삼는 죄인입니다. 지옥의 문을 잠깐 열었다 닫아주실 순 없으신가요? 그 틈으로 살짝 밀어 넣고 싶습니다만.
운수 진짜라고요. 앉아서 딱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저놈이 지금 땡을 쥐고 있구나, 삼팔따라지를 쥐고 구라를 치고 있구나, 하는 게 보입니다.
대복 그거 정말 놀라운 일이구나. 어찌나 놀라운지 전혀 믿기지가 않아.
운수 열에 여덟은 정확하게 맞힙니다. 이제야 빛을 보는 겁니다, 그간의 세월 동안 쌓인 경험과 그리고.
대복 돈과 빚이.
운수 네, 그렇죠. 정말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터집니다, 빰빠라밤~.
대복 내 속이나 터지게 하지 마라. (사이) 그런데.
운수 네, 존경하는 아버님.
대복 상대 패가 보이는데 왜 돈을 못 따는 거냐?
운수 중요한 지적이십니다.
대복 이유가 뭐냐?
운수 제 패가 그놈들 패보다 낮아서죠.
대복 아! 그렇구나. 그렇지, 그래. 그걸 몰랐네. 내가 몰랐어. (사이) 어떤 패를 들었는지는 보이는데, 그 패를 이길 수 없는 개패만 들어온다 이거지. 그렇지?
운수 환장할 일이죠. 한 끗으로 밟히고 족보로 밟히고 땡으로도 밟히고.
대복 그러니까, 재수가 없는 놈이구나 너는.
운수 기다리세요. 아스팔트는 깔렸습니다.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대복 노름꾼에 거짓말쟁이에 재수까지 없는 아이입니다. 하나님 곁에 자리가 남아 있나요?
운수 정말, 미치겠다니까요.
대복 정신 빠진 놈.
발톱을 정리하고 대복이 뒷마당으로 나가자 운수는 피곤한지 소파에 깊이 몸을 묻는다. 잠시 후 안방 문을 열고 옥화 등장. 손에 쥔 기저귀를 주방 쪽에 있는 휴지통에 버린 후 소파 쪽으로 와 잠든 운수를 본다. 옆 소파에 걸쳐진 담요를 들어 운수의 몸에 덮어주는 옥화. 뒷마당에서 들어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대복, 가만히 서 있다가 안방으로 들어간다. 옥화, 소파에 앉아 이불을 개기 시작한다.
운수 (깜짝 놀라 일어나며 잠꼬대한다) 야 이 개새끼야, 이 씨벌놈아. 내 돈이야.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며 씩씩댄다. 뜨악해하는 옥화와 눈이 마주치자 태연한 척한다) 언제 나오셨어요?
옥화 미칠 거면 저 산골 오지 같은 데 가서 미쳐다오. 내가 못 찾아갈 곳에.
운수 며칠 만에 본 아들이 조금은 반갑지 않으세요?
옥화 그럴 리가. 전~혀 반갑지가 않단다.
운수 마음에도 없는 말 하십니다 또.
옥화 네가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운수 별일 없었어요?
옥화 없었다.
운수 정말요?
옥화 어제도 없었고 오늘도 없었고, 내일도 없을 거다. 하긴, 그런 게 너한테 뭐 중요하겠니. 한 달에 반을 밖에서 자는 애가.
운수 저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옥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날 도와주는 거다.
운수 그럴까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멍청하게 손가락만 빨고 집안에 처박혀 있을까요? (사이) 빌어먹을. (일어난다)
옥화 혹시, 여자 생겼냐?
운수 무슨 소리에요?
옥화 정희 엄마가 봤다더라, 네가 어제 젊은 여자랑 시장 입구 족발집에 있는 걸.
운수 (다시 자리에 앉는다) 아, 그분. 평생을 남 얘기로 입을 털어오신 분이죠.
옥화 그래도 없는 얘긴 안 턴다. 누군데?
운수 아무 사이 아니에요.
옥화 말해봐. 어떤 사람인데?
운수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옥화 너 갔다 온 거 알아?
운수 나 참. 그냥 아는 다방 여자애예요.
옥화 다방?
운수 (실망한 듯 보이는 옥화를 보며) 대체 뭘 생각했던 거예요? 아직도 저한테 무슨 기대 같은 걸 갖고 계세요?
옥화 그런 거 없다. (사이) 좀 제대로 된 여잘 만나면 세상이 무너지냐?
운수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옥화 알아서 하기는. 알아서 해서 이 모양 이 꼴이지.
운수 어머니!
불편한 침묵이 흐른다. 잠시 후 아기 울음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온다. 울음소리 점점 커진다.
운수 저거 아직도 안 갖다 버렸어요?
옥화 말 좀 예쁘게 해라. 저거라니.
운수 만석인 어디 갔어요?
옥화 씻는다.
운수 이 자식은 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옥화 이따 데려다주기로 했다더라.
운수 그래요?
옥화 정말 우리가 키우면 안 되겠냐?
운수 누구요?
옥화 우리!
운수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마세요.
옥화 만석인 절대 안 된다는데, 네가 얘기 좀 잘 해봐.
운수 나도 싫어요. 그리고 그게 그럴 수가 없어요.
대복 (목소리) 여보, 이리 좀 들어와 봐.
옥화, 뭔가 더 이야기를 하려다 말고 방으로 들어간다.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소파에 기대서 거실을 둘러보는 운수. 욕실 문이 열리고, 바지와 러닝만 입은 만석이 머리를 털며 등장.
운수 여, 아들. (모른 체하는 만석을 향해) 인사 좀 하지.
만석 오셨어요.
운수 그래. (방으로 곧장 들어가려는 만석을 멈춰 세우며) 아들아. 이리 좀 앉아봐라.
만석 바쁩니다.
운수 나도 바빠. 딱 일 분만 얘기하자.
만석 (앉으며) 왜요?
운수 (무심하게) 너, 뭐하는 놈이야?
만석 뭐가요?
운수 (주방 쪽에 있는 종이상자를 가리키며) 저거 말이야.
만석 저게 뭐예요?
운수 저거 말이야, 저거. 벌써 며칠째야? 열흘 정도 되지 않았냐?
만석 (알아차리고) 일주일밖에 안 됐어요.
운수 밖에는 뭐가 밖에야? 그 일주일 새에 저 방 안에 뭐가 채워졌는지 모르냐? 젖병에 딸랑이에 인형에. 그것만으로도 한 살림이다.
만석 오늘 데리고 갈 겁니다. 담당자 만나기로 했어요.
운수 그런 건 바로바로 처리했어야지.
만석 제가 알아서 합니다.
운수 아니지, 아니지. 이건 우리의 문제라고. 네가 저걸 이 집 안에 들여놓았던 순간부터 말이야, 우리 가족은 모두 공범이 된 거라고.
만석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담당공무원과도 이미 다 얘기가 됐거든요.
운수 공무원? 이 자식 순진하게. 걔네들이 뒤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누가 알아? 다짐을 받아 놔야지 서면으로다.
만석 믿을 만한 사람들이에요. 애 있는 동안 매일 찾아와서 체크하고.
운수 (말 자르며) 확실하게 하란 말이다. (사이) 여자는? 연락은 됐고?
만석 아뇨. 전화기가 계속 꺼져 있어요.
운수 처음 몇 번은 받았잖아.
만석 받았죠.
운수 뭐라고 그랬댔지? 그 남자 애가 확실하니까 잘 키우든, 아님 고아원에 버리든 알아서 하라고?
만석 그랬죠.
운수 망통 같은 년. 애가 무슨 쓰레기야? (사이) 남자는?
만석 여전히 연락 두절. 출입국 기록을 보면 필리핀 쪽으로 간 것 같다던데.
운수 하긴 나라도 웬 여자가 네 애 낳았으니까 네가 알아서 키워 했으면 외국으로 떴을 거다.
만석 경찰이 조사하고 있으니까 곧 해결되겠죠.
운수 뭐, 하든 말든. 아무튼 요즘 젊은 것들은 이해를 못 하겠어. 대체 어떤 강심장이면 애를 박스에 담아서 퀵으로 보낼 수 있나? 대단해, 대단해. 졸라게 놀라워. 안 그러냐?
만석 전 별로. 어렸을 때부터 하도 놀라운 일을 많이 겪어서. 본인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운수 넌 누굴 닮아서 그렇게 비아냥이 수준급이냐? (말이 없는 만석을 향해) 됐고. 정말 네 애 아니지? 마지막 기회다. 지금 말하면 다 용서해주마.
만석 대체 몇 번을.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요?
운수 근데 너도 생각을 해봐. 퀵으로 물건을 받았어. 물건을 받았는데 수취인이 없어. 수취인도 없고 돈도 착불이라 못 받고. 다시 연락을 하니까 전화기가 꺼져 있어. 하는 수 없이 집으로 가져왔는데, 짜잔. 램프의 요정처럼 아이가 튀어나왔네? 너라면 이게 이해가 가냐?
만석 이해가 안 가면 이해를 하지 마세요. 어차피 관심도 없잖아요.
운수 네가 이 애빌 가다마사, 띄엄띄엄 보는, 아주 건방진 경향이 있는데.
만석 (말 자르며) 됐어요. 내 애 아니고, 오늘 데려다줄 거고, 그걸로 끝입니다. 그러니 더는 아무 말 마세요.
운수 (곰곰이 생각하다) 그런데 말이야. 이런 경우엔, 뭔가 보상금 같은 거 안 주냐? 일주일을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했는데.
만석 안 줍니다. 버려진 애 돌봐주고 무슨 돈을 바래요? 양심도 없어요?
운수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양심이 무슨 소용이라고. 그러다 손가락 빨고 사는 거야. 손해만 보다 빚더미에 올라앉는 거고.
만석 우리 집도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죠. 누구 덕분에.
운수 (기분 나빠하지 않고 반색하며) 그러니까, 뭔가 탈출구가 절실한 상황이다. 아들아. 그런 의미에서, 총알 좀 있냐? 이번에야말로 빚에서 좀 벗어나보게.
만석 (어이없어하며) 없어요.
운수 갚는다, 갚아. 이번에 한꺼번에 갚는다. 얼마지 이제까지 빌린 게? 한 백만 원 되냐?
만석 이백십팔만 사천오백 원이요!
운수 거짓말하지 말고.
만석 이자 빼고 원금만!
운수 그렇게 많았냐? 사천오백원은 뭐야?
대복 지난주에 가져간 담뱃값이요.
운수 아, 그래, 백 원짜리랑 십 원짜리 말이지.
집 앞 편의점 알바애가 실실 쪼개더라. 십 원이 남네요, 하면서. 그 뒤로 내가 거길 못 가요.
만석 능력 없으면 끊으세요.
운수 담배까지 못 피우면 이 엿 같은 세상을 어떻게 견디겠냐?
만석 그래서, 얼마요?
운수, 비굴하게 웃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인다. 만석,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만석 여기요.
운수 (지폐를 보며) 뭐냐 이게?
만석 담배 네 갑은 살 수 있을 겁니다.
운수 (손가락 두 개를 힘차게 펴며) 이 두 개를 말한 거지, (손가락을 굽혀서 내보이며) 이 두 개가 아니라.
만석 없어요.
운수 그러지 말고. 이번 주말 지나면 바로 준다니까, 진짜로.
만석 없습니다. (사이) 다음주 할머니 병원 가는 거 알고 있죠?
운수 벌써 한 달이 지났냐?
만석 이번엔 몇 십만 원이라도 좀 내세요. 할아버지도 나도 이제 돈 나올 데가 없어요. 목구멍까지 찼다고요.
운수 알았어, 알았어. (혼잣말처럼) 그러니까 내가 신약으로 하자니까.
만석 할머니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어요?
운수 네 할머니이기 전에 내 엄마야. 어디서 돼먹지 않은 소리야?
만석 똑바로 하시라고요, 그러니까.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를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이게 다예요.
운수 필요 없어, 새끼야. 보자 보자 하니까 지 애비를 허수아비 짚단으로 알아. 싸가지 없는 새끼.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간다. 잠시 후 다시 나와 지폐를 챙기고 욕실로 향한다) 두고 봐,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네놈 얼굴에 뿌려줄 테니까.
만석 이백이십오만 사천오백 원입니다.
운수, 가만히 노려보다 욕실로 들어가 문을 세차게 닫는다. 멍하니 지갑을 들여다보는 만석. 한숨을 쉬다 옆에 놓여 있는 빨랫감을 발견하고 정리하기 시작한다. 잠시 후 빈 분유통을 들고 나오는 옥화. 분유통을 싱크대에 넣은 후 소파로 와 앉는다.
옥화 저녁은 어떡할래?
만석 바로 나가봐야 해요.
옥화 뭐가 급하다고 밥도 걸러. 찌개 끓여 놓은 거 데우면 되니까 한술 뜨고 가.
만석 담당 직원이 곧 전화할 거예요. 준비하고 있다 바로 나가야 해요.
옥화 그 사람은 주말에도 일한다니?
만석 그 사람도 빨리 마무리하고 싶겠죠.
옥화 여기 있는다고 애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뭘 그리 야박하게. 전화해서 월요일에 데리러 오라 그래라.
만석 이미 끝난 일이에요. 더이상은 안 돼요. 아까 얘기드렸잖아요.
옥화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야. 애를 데려가면 재울 데는 있대? 분유는 탈 줄 알고? 이제야 겨우 적응 좀 했는데, 또 이렇게 다른 데로 보내면 애가 놀라. 월요일에 오라 그래.
만석 그 사람들은 그게 직업이에요. 버려진 애들 보살피는 거.
옥화 버려지다니.
만석 빨리 가야 적응을 하죠. 여기서 계속 살 수 없잖아요?
옥화 왜 못 살아? 그냥 살면 되지. 아버지가 아무 얘기 안 하던?
만석 (얼버무리며) 별말 없었는데요.
옥화 하여튼 도움이 안 돼요. (사이) 한 번 더 생각해봐라.
만석 뭘요?
옥화 우리가 키우는 거 말이다.
만석 (단호하게) 그건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옥화 네가 말한 그 절차라는 것만 해결하면 키울 수 있는 거잖냐.
만석 그냥 들은 걸 얘기한 거예요. 저도 잘 몰라요. 사실 알고 싶지도 않고요.
옥화 그 애 얼굴을 봐서 알잖니? 큰 눈망울, 둥근 콧잔등에 숱도 무성하고. 사랑받으며 크면 이쁘게 자랄 거야. 천벌받아, 그런 애 버리면.
만석 천벌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어요. 애가 어떻게 되든 말든 버리고 도망간 사람들이죠.
옥화 이 할미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싶다.
만석 자식을 버리는 게 이해가 가요 할머닌? 그래요?
옥화 (당황하며) 그건 아니다만. 그래도 이게 다 인연 아니겠나 싶고.
만석 여긴 그냥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에요. 길어지면 불행한 인연이 될 뿐이죠.
옥화 애 생각을 해봐라. 어디 멀리 외국에 보내져서 소젖 짜고 양털이나 벗겨내게 할 셈이냐?
만석 누가 그래요?
옥화 나도 귀가 있고 눈이 있어. 티비에서 다 봤다.
만석 팔려 가는 게 아니에요, 입양이죠. 외국 가서 더 잘 먹고 좋은 교육받고 더 사랑받고 클 거예요. 그리고 아무려면 어때요. 내 아이도 아닌데.
옥화 우리 손자가 언제부터 이렇게 인정머리가 없어졌을까. 민달팽이 집이 없다고, 불쌍하다고 울던 우리 착한 손자는 어디 갔을까. 응? (사이, 달래듯) 그러지 말자. 어디 보내지 말고 우리가 키우자.
만석 우리 형편을 좀 생각하세요.
옥화 입 하나 는다고 당장 내일 굶어 죽는다니? 제 먹을 건 타고나는 거야.
만석 다 있는 사람들 이야기에요.
옥화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다 생각이 있다.
만석 무슨 생각이요?
옥화 그 절차라는 거, 내가 하면 되지.
만석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옥화 왜 말이 안 돼?
만석 할머니는 안 돼요.
옥화 내가 왜 안 돼?
만석 암 환자가 무슨 애를 키워요?
옥화 (당황하며) 그게 무슨. 암 환잔 애를 못 키운다니?
만석 입양도 못 할 거예요.
옥화 이 집에 나 혼자뿐이냐? 너도 있고, 운수도 있고, 네 할아버지도 있고.
만석 전 빼주세요. 도와 드리지 않을 거니까.
옥화 그래, 그럼 넌 빠지고. 나랑 네 애비랑, 아니 네 할아버지랑 키우지 뭐.
만석 맘대로 하세요. 근데 애는 오늘 데리고 갈 거예요. 그렇게 하기로 했고요. 얘긴 끝났습니다.
옥화 안 된다. 그렇게 안 둘 거야, 이 할미가.
만석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하셔야 해요. (방으로 향한다)
옥화 (혼잣말처럼) 커갈수록 지 애비를 닮아가는 건지.
만석, 옥화의 말을 듣고 잠시 멈춰 서 있다가 그대로 방으로 들어간다. 옥화, 멍하니 앉아 있다. 잠시 후 대복 안방에서 나온다. 검정색 양복을 입고 있다. 욕실 문을 열고 깜짝 놀라는 대복.
대복 아이고 깜짝이야. 뭔 짓이냐, 이 망할 자식아!
운수 (목소리만) 뭐가요?
대복 왜 그러고 섰냐고?
운수 (목소리만) 하루에 삼사 분씩 이렇게 물구나무를 서줘야 뇌경색에 안 걸린답니다.
대복 옷이나 처입고 해라.
운수 (목소리만) 아버지, 여긴 욕실이라고요.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는 대복. 주방으로 가 대충 손을 닦고 거실 쪽으로 나와 소파에 앉는다.
대복 애새끼가 갈수록 이상해져. (사이, 혼자 웃으며) 아, 고놈, 참 여자애라서 그런지 애교가 장난이 아니네. 눈웃음치는 게 어찌나 이쁜지. 안 그래? (옥화가 반응이 없자) 뭐해?
옥화 응? 왜요 왜?
대복 어따 정신을 팔고 있어?
옥화 뭐라고 했어요?
대복 밥 먹자고.
옥화 아, 그래요, 그래야죠.
대복 (일어서는 옥화를 말리며) 이 사람이 나사가 빠졌나. 있어 그냥. 저녁은 무슨. 연씨네 상갓집 가기로 했잖아.
옥화 어디요? 아, 그랬죠, 상갓집.
대복 약 때문에 그래? (문득 생각난 듯) 아, 애는 만석이가 보나?
옥화 (힘없이) 조금 있다 데려다주기로 했대요.
대복 (실망한 듯,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래. 오늘? 뭔 사람들이 주말에도 일을 하나.
옥화 만석일 잘못 키웠나 봐요.
대복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옥화 엄마 없는 손자새끼, 기 안 죽이고 번듯하게 키우려고 어르고 달래고 오냐오냐 키웠더니 어른 되더니 인정머리도 없고, 고집불통에, 저밖에 모르고.
대복 헛소리하지 마. 만석이만 한 놈이 요즘 세상에 어디 있다고. 내가 살면서 유일한 자랑거리가 있으면 만석이 놈이 내 손자라는 거야.
옥화 나도 그런 줄 알았죠.
대복 맘고생을 하면서 커서 그런지 어린놈이 어둔 구석이 있긴 하지만.
옥화 친구도 하나 없는 거 아니겠죠?
대복 헛소리 지껄일 거면 가서 옷이나 챙겨 입고 나와.
옥화 정말 우리가 키우면 안 될까요?
대복 누굴?
옥화 저 애요.
대복 어허, 이 사람. 물이나 줘.
옥화 왜요? 불가능한 일도 아니잖아요.
대복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무책임한 일이지.
옥화 (물을 가지러 가며) 풍족하게 키우진 못해도 부족하게 안 키우면 되잖아요. 딴 집에 가서 어떻게 클지 누가 알아요.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데.
대복 당신이 신경쓸 일 아니야 그건.
옥화 그럼 난 뭘 할까요? 왜요? 당신도 암 환자가 뭔 소릴 하나 싶은 거예요?
대복 이 사람, 할 게 왜 없어?
옥화 뭐요?
대복 (무심하게) 잘 보내줘야지.
둘 다 잠시 말이 없다. 잠시 후 물을 떠서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옥화. 대복, 마신다.
대복 (곧바로 잔을 내려놓으며) 찬물 없어?
옥화 따뜻한 거 드세요.
대복 사십 년 동안 내가 따뜻하게 마시는 거 봤어?
옥화 배 아프다면서요.
대복 그런 적 없는데.
옥화 지난밤에도 배 붙잡고 끙끙댄 거 다 알아요.
대복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안 돼. 살던 대로 살아야지.
옥화 살던 대로 살아서 이 모양 이 꼴이잖아요.
대복 우리 꼴이 어때서? 이만하면 잘살았지. (냉장고 냉동칸에서 얼음을 꺼내 컵에 담아 휘젓는다)
옥화 거기 찬장 위에 좀 봐요.
대복 왜?
옥화 만석이가 무슨 비타민인가 사왔다고 하루에 하나씩 먹으라고 했어요.
대복 (찬장을 뒤적여 약통을 꺼내 읽는다) 아쿠알렌? 이게 뭔데?
옥화 몰라요, 몸에 좋대요.
대복 당신이나 먹어.
옥화 드세요.
대복 아, 안 먹어. 내가 평생 약이란 걸 먹고 살았던가. 당신이나 꼬박꼬박 챙겨 먹어, 까먹지 말고. (약통을 다시 찬장에 넣는다)
옥화 난 다른 약 못 먹어요. 의사가 그랬어요, 치료하는 동안 다른 약은 먹지도 말라고.
대복 (찬장 문을 닫으며) 아, 몰라. 그럼 낫고 나서 먹든가. (그냥 물만 마신다)
옥화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좀 해봐요. 따뜻한 물도 싫다, 약도 싫다, 그놈의 고집은.
대복 칠십 년을 이렇게 살았어. (소파 테이블로 잔을 가져온다)
옥화 앞으로 반백년은 더 살 텐데, 지금부터라도 건강 챙겨야죠.
대복 시답지 않은 소리. 오늘내일하는데 새삼스럽게 뭔 건강 타령이야. 요즘엔 아주 귀가 따가워, 하도 몸 여기저기가 곡소리를 내서. 운전도 그만해야 할까봐.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하는지 모르겠어. 이젠 내가 겁이 나. 차 몰고 가다 승객들 얼굴을 보면 이 사람들, 다 내 저승길에 데려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니까. 요즘엔 정말이지 제발 곱게만 죽었으면 하는 게. (시무룩해하는 옥화를 보며) 괜찮겠어? 상갓집엔 나 혼자 가도 돼.
옥화 아니에요, 같이 가요. 연씨네가 남도 아니고.
대복 인생 참 허무하지. 그 양반이 그렇게 갈 줄 누가 알았어?
옥화 그러게요. 그렇게 시간 아깝다고, 바쁘게 살아야 한다더니 정말 바쁘게 가버렸네요.
대복 그러니까, 뭐든 적당히 하며 살아야 해. (사이) 몸은 어때?
옥화 그냥 그래요.
대복 그냥 그렇다고?
옥화 그냥 그렇다고요.
대복 그냥 그런 게 어떻다는 거야? 좋다는 거야, 나쁘다는 거야?
옥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아요.
대복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다) 그러니까 그게 뭔 말이야?
옥화 아휴, 그냥 그런 줄 알아요.
대복 (멋쩍은 듯 주변을 둘러본다) 사람이, 자꾸, 화가 늘어.
옥화 피곤해요. 좀 누워 있다 나올게요.
대복 전기장판 켜놨어.
옥화 벌써 무슨 전기장판을 켜요, 돈 아깝게.
대복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자면서 오들오들 떠는 거 보기 싫어. 이불도 깔아놨으니까 가서 누워 있어.
옥화 (문득 생각난 듯) 애들 밥을 차려줘야 하는데.
대복 내가 차려줄 테니까 들어가.
옥화 당신이 무슨.
대복 어허, 들어가. 나도 다 할 줄 알아.
옥화 (머뭇거리다) 그럼, 좀만 누울게요.
대복 들어가, 들어가.
옥화 방으로 들어가고 홀로 남은 대복. 천천히 거울 앞으로 걸어간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넥타이를 꺼내 매기 시작한다. 하지만 잘되지 않는지 번번이 실패한다. 욕실 문을 나와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운수. 대복이 포기하고 소파로 걸어 나오자 헛기침을 하며 소파로 다가오는 운수. 욕실로 들어갈 때와 똑같은 모습이다.
운수 아, 개운하다.
대복 (시계를 보고, 운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제대로 씻기나 한 거냐?
운수 진정한 신사는 항상 한결같아야 합니다.
대복 네가 한결같이 얼간이긴 하지.
운수 또 그러신다. 하나뿐인 아들이 얼간이면 퍽도 좋으시겠네요.
대복 이럴 줄 알았다면 줄줄이 낳을 걸 그랬지.
운수 그러시지 그랬어요?
대복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그랬다. 네놈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울 것 같아서.
운수 찢어지게 가난한 건 아니었잖아요, 우리가?
대복 (놀란 얼굴로) 네놈 태어났을 때 우리 전 재산이 얼마였는 줄 아냐? 수중에 칠만 원이 있었다, 칠만 원! 자장면 한 그릇에 삼십 원이었는데, 그걸 못 사먹었다, 돈이 아까워서.
운수 귀에 인이 박이겠어요 그 얘긴.
대복 부탁이니 제발 그 쓸모없는 귀에 좀 박아 놔라. 어디 구멍이라도 뚫린 거냐? 왜 맨날 듣고 흘려, 흘리긴?
운수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사이) 어머닌요?
대복 방에 누워 있다.
운수 밥 먹고 바로 일하러 가야 하는데. 어머니!
대복 네가 차려 먹어라.
운수 왜요?
대복 내 마누라가 네놈 종이냐? 앞으론 네가 차려 먹어.
운수 나 참, 계속하실 거예요? 그만하시죠.
대복 밥솥 안에 밥 있고, 냄비 안에 찌개 있다. 그 손 노름할 때만 쓰지 말고 이젠 네 엄마 좀 도와라.
운수 아니, 밥을 나만 먹어요? 숟가락 하나만 얹자는데, 그것도 못마땅하세요 이젠?
대복 (넥타이를 살피면서) 네 엄마랑 난 초상집 갈 거다.
운수 무슨 초상집을 하루건너 하루씩 가요?
대복 난들 아냐? 줄줄이 하나님 품으로 가는 걸 내가 무슨 수로 막아?
운수 또, 또 흥분하신다.
대복 봐라. 네 애비 꼴을 봐. 나도 곧 간다. 차에 치여 가고, 산책하다 심장마비 걸려 가고, 자다 가고, 내 친구들 다 그렇게 갔어. 나도 멀지 않았다.
운수 아버진 오래 사실 겁니다. 걱정 마세요.
대복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물어보자.
운수 묻지 마세요.
대복 너, 나 가고 네 엄마 가면 뭐하고 살래? 그냥 지금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동네 노름판이나 기웃거리면서 주인 없는 강아지마냥 떠돌면서 살고 싶냐?
운수 퍽도 좋겠습니다.
대복 정신 좀 차려라. 네 나이가 벌써 오십이야.
운수 오십이 뭐 어때서요?
대복 뭔가 대단한 건 못 해냈어도 대단한 척은 해야 할 나이 아니냐. 내가 딱 네 나이 때 이 집을 샀다. 빚 하나 없이. 너도 기억하지?
운수 당연히 기억하죠. 제가 그때 결혼했잖아요.
대복 (당황하며) 그랬냐?
운수 말 나온 김에 저도 하나 물어볼까요?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대복 (말 자르며) 묻지 마라.
운수 그 여잘 왜 그렇게 싫어하셨어요?
대복 그런 적 없다.
운수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근본도 알 수 없는 고아여서? 술집에서 니나노 하던 여자라서? 셋 중에 골라보세요. 아니면, 주관식으로 하셔도 되고요. (대답 없는 대복을 향해 채근하듯) 네, 네?
대복 이상한 아이였다. 음침하고 말도 없고 늘 남의 눈치만 살피고. 병 걸린 사람처럼.
운수 멀쩡할 리가 있습니까? 평생을 비바람 속에서 살아가보세요. 누구라도 이상해집니다. 하지만 절 사랑해줬습니다. 저도 사랑했고요.
대복 나는 네가 더 나은 사람을 만나길 바랬다.
운수 거짓말 마세요. 아버진 그냥 그 여자가 싫었던 겁니다. 아님, 제가 싫었던 건가요?
대복 그 시절 우리 대 부모들은 다 그랬다. 어떤 부모라도 그랬을 거야. 우린 옛날 사람이다.
운수 심지어 만석일 낳고 나서도 변하지 않으셨죠. 아버지도! 어머니도!
대복 그 애가 도망간 게 우리 탓이라는 거냐?
운수 (어이없어하며) 그럼, 누구 잘못일까요? 두 분 말고 그 여잘 싫어한 사람이 또 있었나요?
대복 그만하자. 이십 년도 지난 얘기.
운수 그러죠. 그러니까 쓸데없는 얘기하지 마세요, 아버지도.
대복 (분노하며) 쓸데없는 얘기? 그래서? 앞으로도 그렇게 개차반처럼, 한량처럼, 동네 사람들한테 손가락질받으면서 살겠다고?
운수 제 인생입니다.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안 써요.
대복 신경써라 써. 이 지옥불에 빠질 자식아. 이 동네에서 사십 년을 살았어. 모두가 우릴 안단 말이다.
운수 아버지를 아는 거죠. 어머니를 아는 거고.
대복 너는 뭐 어디서 날아 들어왔냐? 네가 우리 집안 골칫덩이인 것도 다 알아.
운수 그렇게 부끄러우시면 나가 드릴까요?
대복 안 되지, 안 돼. 그럴 수야 없지. 나가서 또 무슨 사골 치려고. 수작 부릴 생각 마라.
운수 아, 그렇죠. 이 집이 아직까지 반은 아버지 거죠?
대복 (정색하며) 더는 안 된다. 한 번 더 사고 치면 그땐 정말 너랑 나랑 갈라서는 거다.
운수 갈라서는 게 그리 낯선 경험이 아니라서.
대복 돈은 어떡할 거냐?
운수 무슨 돈이요? (황당해하는 대복을 향해) 갚을 테니 기다리세요.
대복 원금은 바라지도 않으니 은행이자라도 내놔라.
운수 갚습니다, 원금까지 다. 십 원짜리 하나 빼놓지 않을 테니까 두고 보세요.
대복 말했다. 이자.
운수 알았다고요. 갚는다고요.
이때 방문이 열리고 만석이 거실로 나온다. 외출복 차림이다.
운수 여, 아들아. 아버지 밥 좀 차려다오.
주방으로 향하는 만석. 밥을 차리려 하는 줄 알고 득의만만해하며 대복을 향해 웃음 짓는 운수. 만석이 박스를 살펴보고 소파 쪽으로 가져오자 실망한다.
운수 아드님? 제 말 귓구멍에 들리셨어요?
만석 차려 드세요. 바로 나가봐야 돼요.
운수 뭐 어려운 일이라고. 밥 푸고 찌개 데우고 반찬 꺼내놓으면 되지.
만석 그렇게 하시면 되겠네요.
운수 캬아, 아버지. 보셨죠. 제 아들이 저렇게 자기 소신이 있고 싸가지가 없습니다.
대복 차려 먹어라 네가. 만석아,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라.
운수 아버지, 우리 집안에 언제부터 예의범절이란 단어가 사라진 거죠?
대복 넥타이를 못 매겠어.
만석, 대복 목에 건 채로 넥타이를 매보다가 안 되자 벗겨내 거울 앞으로 가져가 자기 목에 걸고 매듭을 맨다.
운수 하긴. 원래 대단한 집안은 아니죠 저희가. 족보도 없고.
대복 상놈의 집안이라서 미안하구나.
운수 상놈까지는 아니고. 농민이나 소작농, 그 정도 아니었을까요 우리 조상님들은.
대복 내 십이대손 할아버지께선 정오품 정량 별좌 교리셨다. 네놈의 십삼대손 할아버지 말이다.
운수 처음 듣는 얘기네요.
대복 그럴 리가. 삼십 원짜리 자장면 얘기 다음으로 많이 해줬을 텐데.
만석 (넥타이를 대복의 목에 걸어주며) 잠깐 봐요. (정리를 해준다) 됐어요.
운수 아들아, 너는 이 얘기 들어봤냐? 우리 조상 중에 정오품 정, 뭐, 아무튼, 그런 분이 계셨다는데.
만석 근데 이거 너무 낡았어요.
대복 괜찮다. 아직 쓸 만해.
운수 아주 개가 짖는구나, 개가 짖어. 내 말은 다 씹어 드셔들.
만석 이거밖에 없어요? 여기 실밥도 다 터지고. 다른 거 하세요.
대복 괜찮다니까.
운수 손자분 말 들으세요. 온 동네가 영감님을 아신다면서요.
만석 제 거 있는데 가져올게요.
대복 (만류하며) 됐다. 상갓집에 요란하게 하고 가는 거 아냐. 이 정도가 딱 좋아.
만석 할머니랑 같이 가세요?
대복 그래. 저녁 같이 챙겨 먹어라.
만석 저도 바로 나가봐야 해요.
운수 차리고 가라. 네 아버진 배고프다.
대복 밥은 먹어야지.
운수 그래, 밥은 먹어야지.
만석 약속 있어요.
대복 그러냐? 제대로 된 거 먹고 다녀라.
운수 난 약속 없다. 밥 차려줘라.
만석 할머닌요?
대복 방에. 슬슬 깨워야겠다.
만석 제가 들어갈게요. 애도 데리고 나와야 하고.
운수 찌개 데우고 들어가라. 밥 퍼놓고 데리고 나와. 반찬도 꺼내고.
만석 그만 징징대세요.
운수 뭐, 징징? 오냐오냐하니까 이 새끼가 정말.
만석 이젠 제발 철 좀 드시죠.
운수 아유, 그래요. 철이 일찍 들어서 몸이 무거우시겠어요 우리 아드님은.
만석 가족은 안중에도 없죠? 할머니, 할아버지가 고생을 하든 말든 그냥 아버지 편한 대로 살면 그만이죠?
운수 핏대 세우지 마라. 한 대 치겠다 그러다?
만석 할머니 치료비도 그렇고. 할아버지 발톱 수술 못 하는 거 돈 없어서인 거 알고나 있어요? 대출이자가 한 달에 얼만지나 알고 있냐고?
운수 다 아니까 침 튀기지 마라.
만석 아시면 아는 만큼 내놓으세요.
운수 퍽이나 많이 내놓나 보지? 오토바이 그거 타서 얼마나 버냐? 백? 이백?
만석 다른 사람한테 손 안 벌릴 정도는 버니까 걱정 마세요.
운수 아주 그거 돈 조금 빌려줬다고.
만석 모범을 좀 보이시라고요.
운수 왜? 내가 못 미덥냐? 너도 네 엄마처럼 도망갈래?
대복 (엄하게) 그 입 다물어라. 네 귀방맹이 날릴 힘은 나도 아직 있으니까.
운수 좋아요! 한번 해볼까요, 오늘? 삼대가 진하게 한번 엉켜볼까요?
만석 그만하죠.
운수 왜? 막상 하려니까 쫄려? 어이, 아들, 와 봐. 와보라고.
운수, 자리에서 일어나는 만석을 따라가며 뒤통수를 톡톡 친다. 그러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뒤통수를 때리자 만석이 되돌아서 운수의 양손을 잡아챈다. 바닥에 떨어지는 지폐. 곧바로 만석의 멱살을 쥐는 운수. 운수의 팔목을 강하게 쥐는 만석. 대복, 테이블에 있는 컵을 그들을 향해 던진다.
대복 나가라. 내 집에서 당장 나가. 네놈들 둘 다 나가서 영원히 돌아오지 마.
적막이 흐르고, 잠시 후 옥화가 방문을 열고 등장한다. 차분한 옷차림, 손에 바구니를 들고 있다. 바구니 안엔 아이가 잠들어 있다. 운수와 만석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무심히 지나치는 옥화. 테이블 위에 바구니를 올려놓고 소파에 앉는다. 대복을 보고 이마를 찌푸리는 옥화.
옥화 아, 또 왜 그 넥타이를 했어요. 버렸어도 벌써 버렸어야 할 걸.
대복 이 사람 버리긴 왜 버려 이걸.
옥화 멀쩡한 넥타이를 두고 왜 자꾸 그것만.
대복 다 자기 몸에 맞는 게 있는 거야. 난 이게 편해.
옥화 그놈의 고집은.
이때, 전화벨이 울리고 만석 통화한다. 통화가 끝난 후 옥화에게 다가오는 만석. 옥화의 눈치를 보다가 바구니에 손을 뻗는 만석.
옥화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라.
만석 가야 해요, 할머니.
옥화 알았어. 안 보내겠다는 게 아니야. 여기, 이것만 좀 하고. (바구니를 정리한다)
대복 (바구니를 들여다보며) 거기, 거기. 바람 안 들어가게 잘 좀 욱여넣어 봐.
옥화 알겠어요, 있어 봐요.
대복 한 번 더 포대기에 싸야 하지 않겠어?
옥화 그럴까요? 바람이 차니까 아무래도.
만석 그 사람이 집 앞까지 차 가지고 오기로 했어요.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대복 그렇다는데?
옥화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거 없으니까. (계속한다)
운수 (상자를 발로 툭 차며) 야, 이것도 같이 가져가. 여기다 담아왔으니 여기에 담아가야지.
옥화 저 상잔 두고 가라. 저기에 또 이 애를 가둘 수는 없어. 그럴 순 없어.
만석 알겠어요 할머니. 그렇게 할게요.
대복 어이쿠. 깼는데? 여보, 깼어.
옥화 (바구니 안을 보며) 간다고 또 인사한다고 깬 거야, 기특하게? 그런 거야?
대복 우루루루루, 까꿍. 웃는다 웃어. 고놈 참.
옥화 한 번 더 해봐요.
대복 그럴까? 우루루루루, 까꿍!
옥화 (만석을 향해) 아가, 방에 파란색 가방 하나 있어. 그거 좀 갖고 나와.
대복 뭔데?
옥화 애한테 필요한 것 좀 쌌어요.
대복 딸랑이도 넣지 그랬어. 그거 좋아하던데.
옥화 넣었어요.
대복 잘했네.
운수 (빈정거리듯) 참, 재미나게 사십니다, 두 분. 알콩달콩, 보기 좋네요.
대복 아직도 안 나갔냐?
운수 나가야지요. 이 집에 제가 있을 곳이 없는데.
대복 밖엔 있고?
운수 글쎄요. 정말 이제부터라도 찾아볼까요? (바닥에 떨어진 돈을 줍는다. 가방을 가지고 나오는 만석과 눈이 마주치지만 서로 외면한다) 돈도 생겼겠다.
옥화 밥 한 숟갈 뜨고 가. 너 좋아하는 꽃게찌개 끓여놨어.
잠시 침묵.
운수 됐어요. 약속 있어요.
옥화 그럼 냉장고에 넣어 놓을 테니까 낼 아침에 들어와서 먹어.
운수 그냥 드세요. 얼마 된다고 그걸 남겨요. 갔다 올게요. (나간다)
옥화 (밖에서 들리게 큰소리로) 냉장고에 넣어 놓는다. 알았지? 알았지?
대복 (가방을 들고 서 있는 만석에게) 왜 그러고 섰어? 앉아.
만석 집 앞에 와 있대요.
대복 벌써?
만석 네.
옥화 (바구니를 들여다보며) 잘살아라. 사는 게 제 맘처럼 되는 것도 아니니까 부모 원망 말고 운명이려니, 팔자려니, 누구 탓할 것도 없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면 세월 가고 세월 가면 언제 이만큼 왔나 싶을 테니 하루하루 즐겁게 웃으면서 살아. 네 세상도 한세상, 내 세상도 한세상, 결국 한세상 사는 거니, 그러니까 너는 멀리멀리, (떨리는 목소리) 발길 닿는 데까지 멀리 가렴.
대복 (꽃병에서 꽃을 꺼내 바구니 옆에 감는다) 꽃바구니 타고.
옥화 그래, 꽃바구니 타고. 어디, 하루하루가 오늘만 같겠니?
대복 그래. 오늘만 같을라고.
전화벨이 울리지만 받지 않는 만석. 그런 만석을 가만히 올려다보는 옥화. 천천히 바구니를 내어준다.
만석 갔다 올게요. 늦을지도 몰라요. 먼저 주무세요.
대복 그래. 얘기 잘하고 와.
만석 네. 저 가요, 할머니.
반응 없는 옥화. 대복 손짓으로 만석을 보낸다. 만석 밖으로 나간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에 다가가 밖으로 나가는 만석을 지켜보는 대복. 잠시 후 자리로 돌아온다. 그사이 옥화 역시 일어서 서성이다가 가운데 소파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대복 그 옆에 앉아 정면을 응시한다.
대복 갔네.
옥화 갔네요.
대복 그래. (사이) 어떡할까? 우리도 가야지?
옥화 가야죠.
대복 안 가면 안 되겠지?
옥화 안 되겠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씨잖아요.
대복 그래. 가야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씨니까.
옥화 네.
대복 그럼 갈까?
옥화 그래요, 가요.
대복 그래. 가자구.
옥화 가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두 사람. 무대 서서히 어두워진다.
암전.
노대복 69세, 마을버스기사
양옥화 67세, 노대복의 아내
노운수 45세, 노대복·양옥화의 아들, 택시기사
노만석 22세, 노운수의 아들, 퀵서비스맨
때
어느 가을 토요일 저녁
장소
한눈에도 오래되고 허름해 보이는 집의 거실이다. 거실 벽은 얇은 나무합판으로 둘러쳐져 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거나 나무합판이 삐져나온 곳이 보인다. 가구나 테이블, 가전제품, 주방의 싱크대 등에도 오랫동안 사용한 흔적이 역력하다.
무대 뒤쪽은 주방이다. 싱크대와 냉장고 등이 있고, 냉장고 앞에 식탁으로 사용하는 원목 탁자가 있다. 주방 오른쪽으로는 미닫이문이 있고, 이 문을 나가 좁고 긴 복도를 따라가면 현관문이 나온다(객석에서 현관문은 보이지 않는다). 미닫이문 오른쪽 벽에는 커다란 전신 거울이 걸려 있고, 그 바로 옆은 노만석의 방이다.
주방 왼쪽으로는 뒷마당으로 바로 연결되는, 스테인리스로 된 문이 있다. 뒷마당에는 양옥화가 가꾸는 텃밭이 있다. 파나 고추 같은 것들을 키운다. 바로 옆에 방문이 있고(노운수의 방), 그 옆에 또 하나의 문이 있다. 이곳은 욕실 겸 화장실이다. 그리고 그 옆으로 또 하나의 방문이 있다(노대복, 양옥화의 방). 방문이 마치 이 집 인테리어의 전부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 외의 특별한 건 보이지 않는다. 흔한 액자조차 벽에 걸려 있지 않다.
무대 앞쪽에는 온 가족이 앉을 수 있는 패브릭 소파가 객석을 향해 디귿자로 배치되어 있고 담요 같은 것들이 걸쳐져 있다. 왼쪽 소파에는 마른 빨랫감들이 아무렇게 놓여 있다. 가운데에는 테이블이 놓여 있고 꽃병이 있다. 테이블은 나무의 밑동을 잘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이 역시 오래돼 보인다.
무대 밝아지면 대복, 방문을 열고 등장한다. 주방을 어슬렁거리며 뭔가를 찾고 있다. 잠시 후 뭘 찾는지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 기억이 났는지 서랍장을 뒤져 손톱깎이를 찾아 소파 쪽으로 온다.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려놓는다. 자신의 발을 불만스러운 듯 이리저리 살피는 대복. 한참을 들여다보다 깎기 시작한다. 통증이 있는지 간간이 허리를 펴고 심호흡을 한다. 동작을 반복하다 신경질이 나는지 손톱깎이를 옆 소파에 던져 버린다.
대복 빌어먹을! 발가락을 뽑아내든가 해야지.
소파에 드러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손톱깎이를 찾는다. 다시 발톱을 깎기 시작하는 대복. 곧바로 미닫이문이 열리고 휘파람을 불며 운수 등장한다. 무스로 정돈한 올백 머리, 알이 큰 선글라스를 쓰고, 동선운수라고 쓰인 택시회사의 제복을 입고 있다. 거울을 보며 한껏 폼을 잡는 운수. 그런 모습을 한심한 듯 쳐다보는 대복. 잠시 후 둘의 눈이 마주친다. 과장되게 인사를 건네는 운수.
운수 그간 옥체 건강하셨습니까?
대복 누구?
운수 저는 그러니까, 아들입니다.
대복 그런 이름은 내 머릿속엔 없는데. 여긴 어떻게? 분명 문을 걸어 잠갔는데.
운수 수척해 보이십니다, 아버님. 들어가서 쉬시지요. (혼잣말처럼, 하지만 대복에게도 들릴 정도로 크게) 큰일이야, 빨리 기억이 돌아와야 할 텐데.
대복 뽑아낼 게 있는데 뽑아낼 수가 없네요. 어째야 합니까, 하나님.
운수 하나님은 바쁘셔서 그런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대복 쑤욱, 하고 뽑혀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운수 세상에 있는 건 다 있을 만한 이유가 있어섭니다. 마음에 평안을 찾으시지요.
대복 실수를 하셨습니다. 아주 큰 실수를 하셨어요, 하나님. (발톱에 통증을 느끼는지 인상을 찡그린다)
운수 병원엘 가세요. 왜 가만히 두고 병을 키워요?
대복 내 병을 키우는 건 네놈이다, 이 망할 자식아.
운수 또, 또 그러신다. 혈압도 높은 양반이.
대복 어디 가서 뭘 했기에 이제야 기어들어오는 거냐?
운수 뭘 하긴요, 일했죠.
대복 네놈이 야간조인 건 너만 모르고 우리 가족이 다 알아.
운수 일 끝나고 피곤해서 그냥 회사 근처에서 잤습니다.
대복 걸어서 이십 분이면 오는 너의 회사 말이냐?
운수 밤새 운전만 하면 다리가 부어요. 천근만근입니다.
대복 그래, 알지 알아. 나도 사십 년을 운전만 해서 발톱이 이 모양이지. 보이냐? (발을 들어 운수 쪽으로 내민다) 얼빠진 놈. 대체 언제 정신을 차리려고.
운수 그만하세요. 저도 낼모레면 오십이에요.
대복 아유,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겨우 칠십밖에 처먹지 않아서.
운수 먹을 만큼 먹었다는 거죠.
대복 어디서 같잖게 나이 타령이야?
운수 조심하세요. 곧 터집니다, 제 인생에 잭팟이. 뒷일, 감당할 수 있으시겠어요?
대복 감당 못해도 좋으니 제발 좀 터져다오 그놈의 잭팟.
운수 두고 보세요. (거울을 보며 머리를 다듬는다)
대복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발톱을 깎기 시작한다) 어디 이름 모를 강에 가서 돌 껴안고 뛰어들든가 해야지.
운수 (소파에 앉으며) 그 의사 새끼 그거 돌팔이였나봐요. 수술한 지 얼마 됐다고 또 그래요?
대복 내성발톱이란 게 원래 그렇다.
운수 원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요즘 같은 세상에.
대복 내 자식도 내 맘처럼 안 되는데, 뭔들 되겠냐?
운수 이 자식새끼는 자나깨나 아버님, 어머님 생각뿐입니다.
대복 자나깨나 노름 생각뿐이겠지.
운수 노름이라뇨. 친, 목, 도, 모. 남들이 오해하겠어요.
대복 그래. 하룻밤에 몇 백만 원이 오가는 친목도모.
운수 전 아니에요. 그런 돈도 없고.
대복 얼마나 다행이냐, 네놈이 개털인 게.
운수 총알만 있으면. (대복의 험악한 얼굴을 보고) 농담이에요, 농담.
대복 네 엄마 한 번 더 쓰러지면 네 귓구멍에 총알을 박아주마.
운수 말씀 한번 살벌하십니다.
대복 이 집의 절반이 아직도 은행 거라는 것도 잊지 않았겠지, 응? 내가 평생을 일해 장만한 이 집 말이야,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51-23번지!
운수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요. 느낌이 와요. 운의 바람이 저한테 불어오고 있다고요.
대복 여기 죄 많은 노름꾼 하나가 정신 못 차리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회개할 수 있게 정수리에 번개라도 내리쳐 주세요.
운수 요즘엔 말이죠, 상대가 어떤 패를 들었는지가 보여요.
대복 세 치 혀로 거짓을 일삼는 죄인입니다. 지옥의 문을 잠깐 열었다 닫아주실 순 없으신가요? 그 틈으로 살짝 밀어 넣고 싶습니다만.
운수 진짜라고요. 앉아서 딱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저놈이 지금 땡을 쥐고 있구나, 삼팔따라지를 쥐고 구라를 치고 있구나, 하는 게 보입니다.
대복 그거 정말 놀라운 일이구나. 어찌나 놀라운지 전혀 믿기지가 않아.
운수 열에 여덟은 정확하게 맞힙니다. 이제야 빛을 보는 겁니다, 그간의 세월 동안 쌓인 경험과 그리고.
대복 돈과 빚이.
운수 네, 그렇죠. 정말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터집니다, 빰빠라밤~.
대복 내 속이나 터지게 하지 마라. (사이) 그런데.
운수 네, 존경하는 아버님.
대복 상대 패가 보이는데 왜 돈을 못 따는 거냐?
운수 중요한 지적이십니다.
대복 이유가 뭐냐?
운수 제 패가 그놈들 패보다 낮아서죠.
대복 아! 그렇구나. 그렇지, 그래. 그걸 몰랐네. 내가 몰랐어. (사이) 어떤 패를 들었는지는 보이는데, 그 패를 이길 수 없는 개패만 들어온다 이거지. 그렇지?
운수 환장할 일이죠. 한 끗으로 밟히고 족보로 밟히고 땡으로도 밟히고.
대복 그러니까, 재수가 없는 놈이구나 너는.
운수 기다리세요. 아스팔트는 깔렸습니다.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대복 노름꾼에 거짓말쟁이에 재수까지 없는 아이입니다. 하나님 곁에 자리가 남아 있나요?
운수 정말, 미치겠다니까요.
대복 정신 빠진 놈.
발톱을 정리하고 대복이 뒷마당으로 나가자 운수는 피곤한지 소파에 깊이 몸을 묻는다. 잠시 후 안방 문을 열고 옥화 등장. 손에 쥔 기저귀를 주방 쪽에 있는 휴지통에 버린 후 소파 쪽으로 와 잠든 운수를 본다. 옆 소파에 걸쳐진 담요를 들어 운수의 몸에 덮어주는 옥화. 뒷마당에서 들어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대복, 가만히 서 있다가 안방으로 들어간다. 옥화, 소파에 앉아 이불을 개기 시작한다.
운수 (깜짝 놀라 일어나며 잠꼬대한다) 야 이 개새끼야, 이 씨벌놈아. 내 돈이야.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며 씩씩댄다. 뜨악해하는 옥화와 눈이 마주치자 태연한 척한다) 언제 나오셨어요?
옥화 미칠 거면 저 산골 오지 같은 데 가서 미쳐다오. 내가 못 찾아갈 곳에.
운수 며칠 만에 본 아들이 조금은 반갑지 않으세요?
옥화 그럴 리가. 전~혀 반갑지가 않단다.
운수 마음에도 없는 말 하십니다 또.
옥화 네가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운수 별일 없었어요?
옥화 없었다.
운수 정말요?
옥화 어제도 없었고 오늘도 없었고, 내일도 없을 거다. 하긴, 그런 게 너한테 뭐 중요하겠니. 한 달에 반을 밖에서 자는 애가.
운수 저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옥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날 도와주는 거다.
운수 그럴까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멍청하게 손가락만 빨고 집안에 처박혀 있을까요? (사이) 빌어먹을. (일어난다)
옥화 혹시, 여자 생겼냐?
운수 무슨 소리에요?
옥화 정희 엄마가 봤다더라, 네가 어제 젊은 여자랑 시장 입구 족발집에 있는 걸.
운수 (다시 자리에 앉는다) 아, 그분. 평생을 남 얘기로 입을 털어오신 분이죠.
옥화 그래도 없는 얘긴 안 턴다. 누군데?
운수 아무 사이 아니에요.
옥화 말해봐. 어떤 사람인데?
운수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옥화 너 갔다 온 거 알아?
운수 나 참. 그냥 아는 다방 여자애예요.
옥화 다방?
운수 (실망한 듯 보이는 옥화를 보며) 대체 뭘 생각했던 거예요? 아직도 저한테 무슨 기대 같은 걸 갖고 계세요?
옥화 그런 거 없다. (사이) 좀 제대로 된 여잘 만나면 세상이 무너지냐?
운수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옥화 알아서 하기는. 알아서 해서 이 모양 이 꼴이지.
운수 어머니!
불편한 침묵이 흐른다. 잠시 후 아기 울음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온다. 울음소리 점점 커진다.
운수 저거 아직도 안 갖다 버렸어요?
옥화 말 좀 예쁘게 해라. 저거라니.
운수 만석인 어디 갔어요?
옥화 씻는다.
운수 이 자식은 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옥화 이따 데려다주기로 했다더라.
운수 그래요?
옥화 정말 우리가 키우면 안 되겠냐?
운수 누구요?
옥화 우리!
운수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마세요.
옥화 만석인 절대 안 된다는데, 네가 얘기 좀 잘 해봐.
운수 나도 싫어요. 그리고 그게 그럴 수가 없어요.
대복 (목소리) 여보, 이리 좀 들어와 봐.
옥화, 뭔가 더 이야기를 하려다 말고 방으로 들어간다.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소파에 기대서 거실을 둘러보는 운수. 욕실 문이 열리고, 바지와 러닝만 입은 만석이 머리를 털며 등장.
운수 여, 아들. (모른 체하는 만석을 향해) 인사 좀 하지.
만석 오셨어요.
운수 그래. (방으로 곧장 들어가려는 만석을 멈춰 세우며) 아들아. 이리 좀 앉아봐라.
만석 바쁩니다.
운수 나도 바빠. 딱 일 분만 얘기하자.
만석 (앉으며) 왜요?
운수 (무심하게) 너, 뭐하는 놈이야?
만석 뭐가요?
운수 (주방 쪽에 있는 종이상자를 가리키며) 저거 말이야.
만석 저게 뭐예요?
운수 저거 말이야, 저거. 벌써 며칠째야? 열흘 정도 되지 않았냐?
만석 (알아차리고) 일주일밖에 안 됐어요.
운수 밖에는 뭐가 밖에야? 그 일주일 새에 저 방 안에 뭐가 채워졌는지 모르냐? 젖병에 딸랑이에 인형에. 그것만으로도 한 살림이다.
만석 오늘 데리고 갈 겁니다. 담당자 만나기로 했어요.
운수 그런 건 바로바로 처리했어야지.
만석 제가 알아서 합니다.
운수 아니지, 아니지. 이건 우리의 문제라고. 네가 저걸 이 집 안에 들여놓았던 순간부터 말이야, 우리 가족은 모두 공범이 된 거라고.
만석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담당공무원과도 이미 다 얘기가 됐거든요.
운수 공무원? 이 자식 순진하게. 걔네들이 뒤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누가 알아? 다짐을 받아 놔야지 서면으로다.
만석 믿을 만한 사람들이에요. 애 있는 동안 매일 찾아와서 체크하고.
운수 (말 자르며) 확실하게 하란 말이다. (사이) 여자는? 연락은 됐고?
만석 아뇨. 전화기가 계속 꺼져 있어요.
운수 처음 몇 번은 받았잖아.
만석 받았죠.
운수 뭐라고 그랬댔지? 그 남자 애가 확실하니까 잘 키우든, 아님 고아원에 버리든 알아서 하라고?
만석 그랬죠.
운수 망통 같은 년. 애가 무슨 쓰레기야? (사이) 남자는?
만석 여전히 연락 두절. 출입국 기록을 보면 필리핀 쪽으로 간 것 같다던데.
운수 하긴 나라도 웬 여자가 네 애 낳았으니까 네가 알아서 키워 했으면 외국으로 떴을 거다.
만석 경찰이 조사하고 있으니까 곧 해결되겠죠.
운수 뭐, 하든 말든. 아무튼 요즘 젊은 것들은 이해를 못 하겠어. 대체 어떤 강심장이면 애를 박스에 담아서 퀵으로 보낼 수 있나? 대단해, 대단해. 졸라게 놀라워. 안 그러냐?
만석 전 별로. 어렸을 때부터 하도 놀라운 일을 많이 겪어서. 본인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운수 넌 누굴 닮아서 그렇게 비아냥이 수준급이냐? (말이 없는 만석을 향해) 됐고. 정말 네 애 아니지? 마지막 기회다. 지금 말하면 다 용서해주마.
만석 대체 몇 번을.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요?
운수 근데 너도 생각을 해봐. 퀵으로 물건을 받았어. 물건을 받았는데 수취인이 없어. 수취인도 없고 돈도 착불이라 못 받고. 다시 연락을 하니까 전화기가 꺼져 있어. 하는 수 없이 집으로 가져왔는데, 짜잔. 램프의 요정처럼 아이가 튀어나왔네? 너라면 이게 이해가 가냐?
만석 이해가 안 가면 이해를 하지 마세요. 어차피 관심도 없잖아요.
운수 네가 이 애빌 가다마사, 띄엄띄엄 보는, 아주 건방진 경향이 있는데.
만석 (말 자르며) 됐어요. 내 애 아니고, 오늘 데려다줄 거고, 그걸로 끝입니다. 그러니 더는 아무 말 마세요.
운수 (곰곰이 생각하다) 그런데 말이야. 이런 경우엔, 뭔가 보상금 같은 거 안 주냐? 일주일을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했는데.
만석 안 줍니다. 버려진 애 돌봐주고 무슨 돈을 바래요? 양심도 없어요?
운수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양심이 무슨 소용이라고. 그러다 손가락 빨고 사는 거야. 손해만 보다 빚더미에 올라앉는 거고.
만석 우리 집도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죠. 누구 덕분에.
운수 (기분 나빠하지 않고 반색하며) 그러니까, 뭔가 탈출구가 절실한 상황이다. 아들아. 그런 의미에서, 총알 좀 있냐? 이번에야말로 빚에서 좀 벗어나보게.
만석 (어이없어하며) 없어요.
운수 갚는다, 갚아. 이번에 한꺼번에 갚는다. 얼마지 이제까지 빌린 게? 한 백만 원 되냐?
만석 이백십팔만 사천오백 원이요!
운수 거짓말하지 말고.
만석 이자 빼고 원금만!
운수 그렇게 많았냐? 사천오백원은 뭐야?
대복 지난주에 가져간 담뱃값이요.
운수 아, 그래, 백 원짜리랑 십 원짜리 말이지.
집 앞 편의점 알바애가 실실 쪼개더라. 십 원이 남네요, 하면서. 그 뒤로 내가 거길 못 가요.
만석 능력 없으면 끊으세요.
운수 담배까지 못 피우면 이 엿 같은 세상을 어떻게 견디겠냐?
만석 그래서, 얼마요?
운수, 비굴하게 웃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인다. 만석,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만석 여기요.
운수 (지폐를 보며) 뭐냐 이게?
만석 담배 네 갑은 살 수 있을 겁니다.
운수 (손가락 두 개를 힘차게 펴며) 이 두 개를 말한 거지, (손가락을 굽혀서 내보이며) 이 두 개가 아니라.
만석 없어요.
운수 그러지 말고. 이번 주말 지나면 바로 준다니까, 진짜로.
만석 없습니다. (사이) 다음주 할머니 병원 가는 거 알고 있죠?
운수 벌써 한 달이 지났냐?
만석 이번엔 몇 십만 원이라도 좀 내세요. 할아버지도 나도 이제 돈 나올 데가 없어요. 목구멍까지 찼다고요.
운수 알았어, 알았어. (혼잣말처럼) 그러니까 내가 신약으로 하자니까.
만석 할머니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어요?
운수 네 할머니이기 전에 내 엄마야. 어디서 돼먹지 않은 소리야?
만석 똑바로 하시라고요, 그러니까.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를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이게 다예요.
운수 필요 없어, 새끼야. 보자 보자 하니까 지 애비를 허수아비 짚단으로 알아. 싸가지 없는 새끼.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간다. 잠시 후 다시 나와 지폐를 챙기고 욕실로 향한다) 두고 봐,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네놈 얼굴에 뿌려줄 테니까.
만석 이백이십오만 사천오백 원입니다.
운수, 가만히 노려보다 욕실로 들어가 문을 세차게 닫는다. 멍하니 지갑을 들여다보는 만석. 한숨을 쉬다 옆에 놓여 있는 빨랫감을 발견하고 정리하기 시작한다. 잠시 후 빈 분유통을 들고 나오는 옥화. 분유통을 싱크대에 넣은 후 소파로 와 앉는다.
옥화 저녁은 어떡할래?
만석 바로 나가봐야 해요.
옥화 뭐가 급하다고 밥도 걸러. 찌개 끓여 놓은 거 데우면 되니까 한술 뜨고 가.
만석 담당 직원이 곧 전화할 거예요. 준비하고 있다 바로 나가야 해요.
옥화 그 사람은 주말에도 일한다니?
만석 그 사람도 빨리 마무리하고 싶겠죠.
옥화 여기 있는다고 애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뭘 그리 야박하게. 전화해서 월요일에 데리러 오라 그래라.
만석 이미 끝난 일이에요. 더이상은 안 돼요. 아까 얘기드렸잖아요.
옥화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야. 애를 데려가면 재울 데는 있대? 분유는 탈 줄 알고? 이제야 겨우 적응 좀 했는데, 또 이렇게 다른 데로 보내면 애가 놀라. 월요일에 오라 그래.
만석 그 사람들은 그게 직업이에요. 버려진 애들 보살피는 거.
옥화 버려지다니.
만석 빨리 가야 적응을 하죠. 여기서 계속 살 수 없잖아요?
옥화 왜 못 살아? 그냥 살면 되지. 아버지가 아무 얘기 안 하던?
만석 (얼버무리며) 별말 없었는데요.
옥화 하여튼 도움이 안 돼요. (사이) 한 번 더 생각해봐라.
만석 뭘요?
옥화 우리가 키우는 거 말이다.
만석 (단호하게) 그건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옥화 네가 말한 그 절차라는 것만 해결하면 키울 수 있는 거잖냐.
만석 그냥 들은 걸 얘기한 거예요. 저도 잘 몰라요. 사실 알고 싶지도 않고요.
옥화 그 애 얼굴을 봐서 알잖니? 큰 눈망울, 둥근 콧잔등에 숱도 무성하고. 사랑받으며 크면 이쁘게 자랄 거야. 천벌받아, 그런 애 버리면.
만석 천벌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어요. 애가 어떻게 되든 말든 버리고 도망간 사람들이죠.
옥화 이 할미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싶다.
만석 자식을 버리는 게 이해가 가요 할머닌? 그래요?
옥화 (당황하며) 그건 아니다만. 그래도 이게 다 인연 아니겠나 싶고.
만석 여긴 그냥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에요. 길어지면 불행한 인연이 될 뿐이죠.
옥화 애 생각을 해봐라. 어디 멀리 외국에 보내져서 소젖 짜고 양털이나 벗겨내게 할 셈이냐?
만석 누가 그래요?
옥화 나도 귀가 있고 눈이 있어. 티비에서 다 봤다.
만석 팔려 가는 게 아니에요, 입양이죠. 외국 가서 더 잘 먹고 좋은 교육받고 더 사랑받고 클 거예요. 그리고 아무려면 어때요. 내 아이도 아닌데.
옥화 우리 손자가 언제부터 이렇게 인정머리가 없어졌을까. 민달팽이 집이 없다고, 불쌍하다고 울던 우리 착한 손자는 어디 갔을까. 응? (사이, 달래듯) 그러지 말자. 어디 보내지 말고 우리가 키우자.
만석 우리 형편을 좀 생각하세요.
옥화 입 하나 는다고 당장 내일 굶어 죽는다니? 제 먹을 건 타고나는 거야.
만석 다 있는 사람들 이야기에요.
옥화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다 생각이 있다.
만석 무슨 생각이요?
옥화 그 절차라는 거, 내가 하면 되지.
만석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옥화 왜 말이 안 돼?
만석 할머니는 안 돼요.
옥화 내가 왜 안 돼?
만석 암 환자가 무슨 애를 키워요?
옥화 (당황하며) 그게 무슨. 암 환잔 애를 못 키운다니?
만석 입양도 못 할 거예요.
옥화 이 집에 나 혼자뿐이냐? 너도 있고, 운수도 있고, 네 할아버지도 있고.
만석 전 빼주세요. 도와 드리지 않을 거니까.
옥화 그래, 그럼 넌 빠지고. 나랑 네 애비랑, 아니 네 할아버지랑 키우지 뭐.
만석 맘대로 하세요. 근데 애는 오늘 데리고 갈 거예요. 그렇게 하기로 했고요. 얘긴 끝났습니다.
옥화 안 된다. 그렇게 안 둘 거야, 이 할미가.
만석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하셔야 해요. (방으로 향한다)
옥화 (혼잣말처럼) 커갈수록 지 애비를 닮아가는 건지.
만석, 옥화의 말을 듣고 잠시 멈춰 서 있다가 그대로 방으로 들어간다. 옥화, 멍하니 앉아 있다. 잠시 후 대복 안방에서 나온다. 검정색 양복을 입고 있다. 욕실 문을 열고 깜짝 놀라는 대복.
대복 아이고 깜짝이야. 뭔 짓이냐, 이 망할 자식아!
운수 (목소리만) 뭐가요?
대복 왜 그러고 섰냐고?
운수 (목소리만) 하루에 삼사 분씩 이렇게 물구나무를 서줘야 뇌경색에 안 걸린답니다.
대복 옷이나 처입고 해라.
운수 (목소리만) 아버지, 여긴 욕실이라고요.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는 대복. 주방으로 가 대충 손을 닦고 거실 쪽으로 나와 소파에 앉는다.
대복 애새끼가 갈수록 이상해져. (사이, 혼자 웃으며) 아, 고놈, 참 여자애라서 그런지 애교가 장난이 아니네. 눈웃음치는 게 어찌나 이쁜지. 안 그래? (옥화가 반응이 없자) 뭐해?
옥화 응? 왜요 왜?
대복 어따 정신을 팔고 있어?
옥화 뭐라고 했어요?
대복 밥 먹자고.
옥화 아, 그래요, 그래야죠.
대복 (일어서는 옥화를 말리며) 이 사람이 나사가 빠졌나. 있어 그냥. 저녁은 무슨. 연씨네 상갓집 가기로 했잖아.
옥화 어디요? 아, 그랬죠, 상갓집.
대복 약 때문에 그래? (문득 생각난 듯) 아, 애는 만석이가 보나?
옥화 (힘없이) 조금 있다 데려다주기로 했대요.
대복 (실망한 듯,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래. 오늘? 뭔 사람들이 주말에도 일을 하나.
옥화 만석일 잘못 키웠나 봐요.
대복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옥화 엄마 없는 손자새끼, 기 안 죽이고 번듯하게 키우려고 어르고 달래고 오냐오냐 키웠더니 어른 되더니 인정머리도 없고, 고집불통에, 저밖에 모르고.
대복 헛소리하지 마. 만석이만 한 놈이 요즘 세상에 어디 있다고. 내가 살면서 유일한 자랑거리가 있으면 만석이 놈이 내 손자라는 거야.
옥화 나도 그런 줄 알았죠.
대복 맘고생을 하면서 커서 그런지 어린놈이 어둔 구석이 있긴 하지만.
옥화 친구도 하나 없는 거 아니겠죠?
대복 헛소리 지껄일 거면 가서 옷이나 챙겨 입고 나와.
옥화 정말 우리가 키우면 안 될까요?
대복 누굴?
옥화 저 애요.
대복 어허, 이 사람. 물이나 줘.
옥화 왜요? 불가능한 일도 아니잖아요.
대복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무책임한 일이지.
옥화 (물을 가지러 가며) 풍족하게 키우진 못해도 부족하게 안 키우면 되잖아요. 딴 집에 가서 어떻게 클지 누가 알아요.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데.
대복 당신이 신경쓸 일 아니야 그건.
옥화 그럼 난 뭘 할까요? 왜요? 당신도 암 환자가 뭔 소릴 하나 싶은 거예요?
대복 이 사람, 할 게 왜 없어?
옥화 뭐요?
대복 (무심하게) 잘 보내줘야지.
둘 다 잠시 말이 없다. 잠시 후 물을 떠서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옥화. 대복, 마신다.
대복 (곧바로 잔을 내려놓으며) 찬물 없어?
옥화 따뜻한 거 드세요.
대복 사십 년 동안 내가 따뜻하게 마시는 거 봤어?
옥화 배 아프다면서요.
대복 그런 적 없는데.
옥화 지난밤에도 배 붙잡고 끙끙댄 거 다 알아요.
대복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안 돼. 살던 대로 살아야지.
옥화 살던 대로 살아서 이 모양 이 꼴이잖아요.
대복 우리 꼴이 어때서? 이만하면 잘살았지. (냉장고 냉동칸에서 얼음을 꺼내 컵에 담아 휘젓는다)
옥화 거기 찬장 위에 좀 봐요.
대복 왜?
옥화 만석이가 무슨 비타민인가 사왔다고 하루에 하나씩 먹으라고 했어요.
대복 (찬장을 뒤적여 약통을 꺼내 읽는다) 아쿠알렌? 이게 뭔데?
옥화 몰라요, 몸에 좋대요.
대복 당신이나 먹어.
옥화 드세요.
대복 아, 안 먹어. 내가 평생 약이란 걸 먹고 살았던가. 당신이나 꼬박꼬박 챙겨 먹어, 까먹지 말고. (약통을 다시 찬장에 넣는다)
옥화 난 다른 약 못 먹어요. 의사가 그랬어요, 치료하는 동안 다른 약은 먹지도 말라고.
대복 (찬장 문을 닫으며) 아, 몰라. 그럼 낫고 나서 먹든가. (그냥 물만 마신다)
옥화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좀 해봐요. 따뜻한 물도 싫다, 약도 싫다, 그놈의 고집은.
대복 칠십 년을 이렇게 살았어. (소파 테이블로 잔을 가져온다)
옥화 앞으로 반백년은 더 살 텐데, 지금부터라도 건강 챙겨야죠.
대복 시답지 않은 소리. 오늘내일하는데 새삼스럽게 뭔 건강 타령이야. 요즘엔 아주 귀가 따가워, 하도 몸 여기저기가 곡소리를 내서. 운전도 그만해야 할까봐.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하는지 모르겠어. 이젠 내가 겁이 나. 차 몰고 가다 승객들 얼굴을 보면 이 사람들, 다 내 저승길에 데려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니까. 요즘엔 정말이지 제발 곱게만 죽었으면 하는 게. (시무룩해하는 옥화를 보며) 괜찮겠어? 상갓집엔 나 혼자 가도 돼.
옥화 아니에요, 같이 가요. 연씨네가 남도 아니고.
대복 인생 참 허무하지. 그 양반이 그렇게 갈 줄 누가 알았어?
옥화 그러게요. 그렇게 시간 아깝다고, 바쁘게 살아야 한다더니 정말 바쁘게 가버렸네요.
대복 그러니까, 뭐든 적당히 하며 살아야 해. (사이) 몸은 어때?
옥화 그냥 그래요.
대복 그냥 그렇다고?
옥화 그냥 그렇다고요.
대복 그냥 그런 게 어떻다는 거야? 좋다는 거야, 나쁘다는 거야?
옥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아요.
대복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다) 그러니까 그게 뭔 말이야?
옥화 아휴, 그냥 그런 줄 알아요.
대복 (멋쩍은 듯 주변을 둘러본다) 사람이, 자꾸, 화가 늘어.
옥화 피곤해요. 좀 누워 있다 나올게요.
대복 전기장판 켜놨어.
옥화 벌써 무슨 전기장판을 켜요, 돈 아깝게.
대복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자면서 오들오들 떠는 거 보기 싫어. 이불도 깔아놨으니까 가서 누워 있어.
옥화 (문득 생각난 듯) 애들 밥을 차려줘야 하는데.
대복 내가 차려줄 테니까 들어가.
옥화 당신이 무슨.
대복 어허, 들어가. 나도 다 할 줄 알아.
옥화 (머뭇거리다) 그럼, 좀만 누울게요.
대복 들어가, 들어가.
옥화 방으로 들어가고 홀로 남은 대복. 천천히 거울 앞으로 걸어간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넥타이를 꺼내 매기 시작한다. 하지만 잘되지 않는지 번번이 실패한다. 욕실 문을 나와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운수. 대복이 포기하고 소파로 걸어 나오자 헛기침을 하며 소파로 다가오는 운수. 욕실로 들어갈 때와 똑같은 모습이다.
운수 아, 개운하다.
대복 (시계를 보고, 운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제대로 씻기나 한 거냐?
운수 진정한 신사는 항상 한결같아야 합니다.
대복 네가 한결같이 얼간이긴 하지.
운수 또 그러신다. 하나뿐인 아들이 얼간이면 퍽도 좋으시겠네요.
대복 이럴 줄 알았다면 줄줄이 낳을 걸 그랬지.
운수 그러시지 그랬어요?
대복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그랬다. 네놈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울 것 같아서.
운수 찢어지게 가난한 건 아니었잖아요, 우리가?
대복 (놀란 얼굴로) 네놈 태어났을 때 우리 전 재산이 얼마였는 줄 아냐? 수중에 칠만 원이 있었다, 칠만 원! 자장면 한 그릇에 삼십 원이었는데, 그걸 못 사먹었다, 돈이 아까워서.
운수 귀에 인이 박이겠어요 그 얘긴.
대복 부탁이니 제발 그 쓸모없는 귀에 좀 박아 놔라. 어디 구멍이라도 뚫린 거냐? 왜 맨날 듣고 흘려, 흘리긴?
운수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사이) 어머닌요?
대복 방에 누워 있다.
운수 밥 먹고 바로 일하러 가야 하는데. 어머니!
대복 네가 차려 먹어라.
운수 왜요?
대복 내 마누라가 네놈 종이냐? 앞으론 네가 차려 먹어.
운수 나 참, 계속하실 거예요? 그만하시죠.
대복 밥솥 안에 밥 있고, 냄비 안에 찌개 있다. 그 손 노름할 때만 쓰지 말고 이젠 네 엄마 좀 도와라.
운수 아니, 밥을 나만 먹어요? 숟가락 하나만 얹자는데, 그것도 못마땅하세요 이젠?
대복 (넥타이를 살피면서) 네 엄마랑 난 초상집 갈 거다.
운수 무슨 초상집을 하루건너 하루씩 가요?
대복 난들 아냐? 줄줄이 하나님 품으로 가는 걸 내가 무슨 수로 막아?
운수 또, 또 흥분하신다.
대복 봐라. 네 애비 꼴을 봐. 나도 곧 간다. 차에 치여 가고, 산책하다 심장마비 걸려 가고, 자다 가고, 내 친구들 다 그렇게 갔어. 나도 멀지 않았다.
운수 아버진 오래 사실 겁니다. 걱정 마세요.
대복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물어보자.
운수 묻지 마세요.
대복 너, 나 가고 네 엄마 가면 뭐하고 살래? 그냥 지금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동네 노름판이나 기웃거리면서 주인 없는 강아지마냥 떠돌면서 살고 싶냐?
운수 퍽도 좋겠습니다.
대복 정신 좀 차려라. 네 나이가 벌써 오십이야.
운수 오십이 뭐 어때서요?
대복 뭔가 대단한 건 못 해냈어도 대단한 척은 해야 할 나이 아니냐. 내가 딱 네 나이 때 이 집을 샀다. 빚 하나 없이. 너도 기억하지?
운수 당연히 기억하죠. 제가 그때 결혼했잖아요.
대복 (당황하며) 그랬냐?
운수 말 나온 김에 저도 하나 물어볼까요?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대복 (말 자르며) 묻지 마라.
운수 그 여잘 왜 그렇게 싫어하셨어요?
대복 그런 적 없다.
운수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근본도 알 수 없는 고아여서? 술집에서 니나노 하던 여자라서? 셋 중에 골라보세요. 아니면, 주관식으로 하셔도 되고요. (대답 없는 대복을 향해 채근하듯) 네, 네?
대복 이상한 아이였다. 음침하고 말도 없고 늘 남의 눈치만 살피고. 병 걸린 사람처럼.
운수 멀쩡할 리가 있습니까? 평생을 비바람 속에서 살아가보세요. 누구라도 이상해집니다. 하지만 절 사랑해줬습니다. 저도 사랑했고요.
대복 나는 네가 더 나은 사람을 만나길 바랬다.
운수 거짓말 마세요. 아버진 그냥 그 여자가 싫었던 겁니다. 아님, 제가 싫었던 건가요?
대복 그 시절 우리 대 부모들은 다 그랬다. 어떤 부모라도 그랬을 거야. 우린 옛날 사람이다.
운수 심지어 만석일 낳고 나서도 변하지 않으셨죠. 아버지도! 어머니도!
대복 그 애가 도망간 게 우리 탓이라는 거냐?
운수 (어이없어하며) 그럼, 누구 잘못일까요? 두 분 말고 그 여잘 싫어한 사람이 또 있었나요?
대복 그만하자. 이십 년도 지난 얘기.
운수 그러죠. 그러니까 쓸데없는 얘기하지 마세요, 아버지도.
대복 (분노하며) 쓸데없는 얘기? 그래서? 앞으로도 그렇게 개차반처럼, 한량처럼, 동네 사람들한테 손가락질받으면서 살겠다고?
운수 제 인생입니다.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안 써요.
대복 신경써라 써. 이 지옥불에 빠질 자식아. 이 동네에서 사십 년을 살았어. 모두가 우릴 안단 말이다.
운수 아버지를 아는 거죠. 어머니를 아는 거고.
대복 너는 뭐 어디서 날아 들어왔냐? 네가 우리 집안 골칫덩이인 것도 다 알아.
운수 그렇게 부끄러우시면 나가 드릴까요?
대복 안 되지, 안 돼. 그럴 수야 없지. 나가서 또 무슨 사골 치려고. 수작 부릴 생각 마라.
운수 아, 그렇죠. 이 집이 아직까지 반은 아버지 거죠?
대복 (정색하며) 더는 안 된다. 한 번 더 사고 치면 그땐 정말 너랑 나랑 갈라서는 거다.
운수 갈라서는 게 그리 낯선 경험이 아니라서.
대복 돈은 어떡할 거냐?
운수 무슨 돈이요? (황당해하는 대복을 향해) 갚을 테니 기다리세요.
대복 원금은 바라지도 않으니 은행이자라도 내놔라.
운수 갚습니다, 원금까지 다. 십 원짜리 하나 빼놓지 않을 테니까 두고 보세요.
대복 말했다. 이자.
운수 알았다고요. 갚는다고요.
이때 방문이 열리고 만석이 거실로 나온다. 외출복 차림이다.
운수 여, 아들아. 아버지 밥 좀 차려다오.
주방으로 향하는 만석. 밥을 차리려 하는 줄 알고 득의만만해하며 대복을 향해 웃음 짓는 운수. 만석이 박스를 살펴보고 소파 쪽으로 가져오자 실망한다.
운수 아드님? 제 말 귓구멍에 들리셨어요?
만석 차려 드세요. 바로 나가봐야 돼요.
운수 뭐 어려운 일이라고. 밥 푸고 찌개 데우고 반찬 꺼내놓으면 되지.
만석 그렇게 하시면 되겠네요.
운수 캬아, 아버지. 보셨죠. 제 아들이 저렇게 자기 소신이 있고 싸가지가 없습니다.
대복 차려 먹어라 네가. 만석아,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라.
운수 아버지, 우리 집안에 언제부터 예의범절이란 단어가 사라진 거죠?
대복 넥타이를 못 매겠어.
만석, 대복 목에 건 채로 넥타이를 매보다가 안 되자 벗겨내 거울 앞으로 가져가 자기 목에 걸고 매듭을 맨다.
운수 하긴. 원래 대단한 집안은 아니죠 저희가. 족보도 없고.
대복 상놈의 집안이라서 미안하구나.
운수 상놈까지는 아니고. 농민이나 소작농, 그 정도 아니었을까요 우리 조상님들은.
대복 내 십이대손 할아버지께선 정오품 정량 별좌 교리셨다. 네놈의 십삼대손 할아버지 말이다.
운수 처음 듣는 얘기네요.
대복 그럴 리가. 삼십 원짜리 자장면 얘기 다음으로 많이 해줬을 텐데.
만석 (넥타이를 대복의 목에 걸어주며) 잠깐 봐요. (정리를 해준다) 됐어요.
운수 아들아, 너는 이 얘기 들어봤냐? 우리 조상 중에 정오품 정, 뭐, 아무튼, 그런 분이 계셨다는데.
만석 근데 이거 너무 낡았어요.
대복 괜찮다. 아직 쓸 만해.
운수 아주 개가 짖는구나, 개가 짖어. 내 말은 다 씹어 드셔들.
만석 이거밖에 없어요? 여기 실밥도 다 터지고. 다른 거 하세요.
대복 괜찮다니까.
운수 손자분 말 들으세요. 온 동네가 영감님을 아신다면서요.
만석 제 거 있는데 가져올게요.
대복 (만류하며) 됐다. 상갓집에 요란하게 하고 가는 거 아냐. 이 정도가 딱 좋아.
만석 할머니랑 같이 가세요?
대복 그래. 저녁 같이 챙겨 먹어라.
만석 저도 바로 나가봐야 해요.
운수 차리고 가라. 네 아버진 배고프다.
대복 밥은 먹어야지.
운수 그래, 밥은 먹어야지.
만석 약속 있어요.
대복 그러냐? 제대로 된 거 먹고 다녀라.
운수 난 약속 없다. 밥 차려줘라.
만석 할머닌요?
대복 방에. 슬슬 깨워야겠다.
만석 제가 들어갈게요. 애도 데리고 나와야 하고.
운수 찌개 데우고 들어가라. 밥 퍼놓고 데리고 나와. 반찬도 꺼내고.
만석 그만 징징대세요.
운수 뭐, 징징? 오냐오냐하니까 이 새끼가 정말.
만석 이젠 제발 철 좀 드시죠.
운수 아유, 그래요. 철이 일찍 들어서 몸이 무거우시겠어요 우리 아드님은.
만석 가족은 안중에도 없죠? 할머니, 할아버지가 고생을 하든 말든 그냥 아버지 편한 대로 살면 그만이죠?
운수 핏대 세우지 마라. 한 대 치겠다 그러다?
만석 할머니 치료비도 그렇고. 할아버지 발톱 수술 못 하는 거 돈 없어서인 거 알고나 있어요? 대출이자가 한 달에 얼만지나 알고 있냐고?
운수 다 아니까 침 튀기지 마라.
만석 아시면 아는 만큼 내놓으세요.
운수 퍽이나 많이 내놓나 보지? 오토바이 그거 타서 얼마나 버냐? 백? 이백?
만석 다른 사람한테 손 안 벌릴 정도는 버니까 걱정 마세요.
운수 아주 그거 돈 조금 빌려줬다고.
만석 모범을 좀 보이시라고요.
운수 왜? 내가 못 미덥냐? 너도 네 엄마처럼 도망갈래?
대복 (엄하게) 그 입 다물어라. 네 귀방맹이 날릴 힘은 나도 아직 있으니까.
운수 좋아요! 한번 해볼까요, 오늘? 삼대가 진하게 한번 엉켜볼까요?
만석 그만하죠.
운수 왜? 막상 하려니까 쫄려? 어이, 아들, 와 봐. 와보라고.
운수, 자리에서 일어나는 만석을 따라가며 뒤통수를 톡톡 친다. 그러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뒤통수를 때리자 만석이 되돌아서 운수의 양손을 잡아챈다. 바닥에 떨어지는 지폐. 곧바로 만석의 멱살을 쥐는 운수. 운수의 팔목을 강하게 쥐는 만석. 대복, 테이블에 있는 컵을 그들을 향해 던진다.
대복 나가라. 내 집에서 당장 나가. 네놈들 둘 다 나가서 영원히 돌아오지 마.
적막이 흐르고, 잠시 후 옥화가 방문을 열고 등장한다. 차분한 옷차림, 손에 바구니를 들고 있다. 바구니 안엔 아이가 잠들어 있다. 운수와 만석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무심히 지나치는 옥화. 테이블 위에 바구니를 올려놓고 소파에 앉는다. 대복을 보고 이마를 찌푸리는 옥화.
옥화 아, 또 왜 그 넥타이를 했어요. 버렸어도 벌써 버렸어야 할 걸.
대복 이 사람 버리긴 왜 버려 이걸.
옥화 멀쩡한 넥타이를 두고 왜 자꾸 그것만.
대복 다 자기 몸에 맞는 게 있는 거야. 난 이게 편해.
옥화 그놈의 고집은.
이때, 전화벨이 울리고 만석 통화한다. 통화가 끝난 후 옥화에게 다가오는 만석. 옥화의 눈치를 보다가 바구니에 손을 뻗는 만석.
옥화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라.
만석 가야 해요, 할머니.
옥화 알았어. 안 보내겠다는 게 아니야. 여기, 이것만 좀 하고. (바구니를 정리한다)
대복 (바구니를 들여다보며) 거기, 거기. 바람 안 들어가게 잘 좀 욱여넣어 봐.
옥화 알겠어요, 있어 봐요.
대복 한 번 더 포대기에 싸야 하지 않겠어?
옥화 그럴까요? 바람이 차니까 아무래도.
만석 그 사람이 집 앞까지 차 가지고 오기로 했어요.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대복 그렇다는데?
옥화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거 없으니까. (계속한다)
운수 (상자를 발로 툭 차며) 야, 이것도 같이 가져가. 여기다 담아왔으니 여기에 담아가야지.
옥화 저 상잔 두고 가라. 저기에 또 이 애를 가둘 수는 없어. 그럴 순 없어.
만석 알겠어요 할머니. 그렇게 할게요.
대복 어이쿠. 깼는데? 여보, 깼어.
옥화 (바구니 안을 보며) 간다고 또 인사한다고 깬 거야, 기특하게? 그런 거야?
대복 우루루루루, 까꿍. 웃는다 웃어. 고놈 참.
옥화 한 번 더 해봐요.
대복 그럴까? 우루루루루, 까꿍!
옥화 (만석을 향해) 아가, 방에 파란색 가방 하나 있어. 그거 좀 갖고 나와.
대복 뭔데?
옥화 애한테 필요한 것 좀 쌌어요.
대복 딸랑이도 넣지 그랬어. 그거 좋아하던데.
옥화 넣었어요.
대복 잘했네.
운수 (빈정거리듯) 참, 재미나게 사십니다, 두 분. 알콩달콩, 보기 좋네요.
대복 아직도 안 나갔냐?
운수 나가야지요. 이 집에 제가 있을 곳이 없는데.
대복 밖엔 있고?
운수 글쎄요. 정말 이제부터라도 찾아볼까요? (바닥에 떨어진 돈을 줍는다. 가방을 가지고 나오는 만석과 눈이 마주치지만 서로 외면한다) 돈도 생겼겠다.
옥화 밥 한 숟갈 뜨고 가. 너 좋아하는 꽃게찌개 끓여놨어.
잠시 침묵.
운수 됐어요. 약속 있어요.
옥화 그럼 냉장고에 넣어 놓을 테니까 낼 아침에 들어와서 먹어.
운수 그냥 드세요. 얼마 된다고 그걸 남겨요. 갔다 올게요. (나간다)
옥화 (밖에서 들리게 큰소리로) 냉장고에 넣어 놓는다. 알았지? 알았지?
대복 (가방을 들고 서 있는 만석에게) 왜 그러고 섰어? 앉아.
만석 집 앞에 와 있대요.
대복 벌써?
만석 네.
옥화 (바구니를 들여다보며) 잘살아라. 사는 게 제 맘처럼 되는 것도 아니니까 부모 원망 말고 운명이려니, 팔자려니, 누구 탓할 것도 없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면 세월 가고 세월 가면 언제 이만큼 왔나 싶을 테니 하루하루 즐겁게 웃으면서 살아. 네 세상도 한세상, 내 세상도 한세상, 결국 한세상 사는 거니, 그러니까 너는 멀리멀리, (떨리는 목소리) 발길 닿는 데까지 멀리 가렴.
대복 (꽃병에서 꽃을 꺼내 바구니 옆에 감는다) 꽃바구니 타고.
옥화 그래, 꽃바구니 타고. 어디, 하루하루가 오늘만 같겠니?
대복 그래. 오늘만 같을라고.
전화벨이 울리지만 받지 않는 만석. 그런 만석을 가만히 올려다보는 옥화. 천천히 바구니를 내어준다.
만석 갔다 올게요. 늦을지도 몰라요. 먼저 주무세요.
대복 그래. 얘기 잘하고 와.
만석 네. 저 가요, 할머니.
반응 없는 옥화. 대복 손짓으로 만석을 보낸다. 만석 밖으로 나간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에 다가가 밖으로 나가는 만석을 지켜보는 대복. 잠시 후 자리로 돌아온다. 그사이 옥화 역시 일어서 서성이다가 가운데 소파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대복 그 옆에 앉아 정면을 응시한다.
대복 갔네.
옥화 갔네요.
대복 그래. (사이) 어떡할까? 우리도 가야지?
옥화 가야죠.
대복 안 가면 안 되겠지?
옥화 안 되겠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씨잖아요.
대복 그래. 가야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씨니까.
옥화 네.
대복 그럼 갈까?
옥화 그래요, 가요.
대복 그래. 가자구.
옥화 가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두 사람. 무대 서서히 어두워진다.
암전.
2017-01-02 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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