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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와 함께 읽는 세계의 명시] 장례식 블루스

[최영미와 함께 읽는 세계의 명시] 장례식 블루스

입력 2016-12-21 22:38
업데이트 2016-12-22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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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블루스(Funeral Blues)

-W H 오든

모든 시계를 멈추고, 전화선을 끊어라,

개에게 기름진 뼈다귀를 던져 주어 짖지 못하게 하라,

피아노들을 침묵하게 하고 천을 두른 북을 두드려

관이 들어오게 하라, 조문객들을 들여보내라.

비행기가 슬픈 소리를 내며 하늘을 돌게 하고,

‘그는 죽었다’는 메시지를 하늘에 휘갈기게 하라.

거리의 비둘기들의 하얀 목에 검은 천을 두르고,

교통경찰관들에게 검은 면장갑을 끼게 하라.

그는 나의 북쪽이고, 나의 남쪽이며, 동쪽이고 서쪽이었다,

나의 일하는 평일이었고 일요일의 휴식이었다,

나의 정오, 나의 자정, 나의 대화, 나의 노래였다;

사랑이 영원한 줄 알았는데, 내가 틀렸다.

별들은 이제 필요 없으니; 모두 다 꺼져버려.

달을 싸버리고 해를 철거해라,

바닷물을 쏟아버리고 숲을 쓸어 엎어라;

이제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으니까.

*

Stop all the clocks, cut off the telephone,

Prevent the dog from barking with a juicy bone,

Silence the pianos and with muffled drum

Bring out the coffin, let the mourners come.

Let aeroplanes circle moaning overhead

Scribbling on the sky the message ‘He is Dead’.

Put crepe bows round the white necks of the public doves,

Let the traffic policemen wear black cotton gloves.

He was my North, my South, my East and West,

My working week and my Sunday rest,

My noon, my midnight, my talk, my song;

I thought that love would last forever: I was wrong.

The stars are not wanted now; put out every one,

Pack up the moon and dismantle the sun,

Pour away the ocean and sweep up the wood;

For nothing now can ever come to any goo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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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
최영미 시인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쯤 전, 수도권의 어느 극장에서 그 시를 처음 들었다. 영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을 보기 전까지 나는 ‘장례식 블루스’라는 제목의 시를 알지 못했다. 영화에 삽입된 시들이 꽤 되지만 ‘장례식 블루스’처럼 성공한 경우는 드물다. 주인공 찰스의 친구인 동성애자가 파트너의 장례식에서 16줄의 시 전문을 낭송하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장례식에서 ‘장례식’ 시를 읊으니 어울리는 장면 아닌가. 시를 쓴 오든도 동성애자였으니, 영화와 시의 궁합이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어두운 극장에 앉아 “그는 나의 북쪽이고, 나의 남쪽이었다”를 처음 들었을 때의 전율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 이렇게 사랑을 표현할 수도 있구나. ‘어디에서건 나는 네가 보여’라고 했다면 감동이 덜했으리라.

입만 열면 그를 말하고, 어떤 노래를 들어도 그를 떠올리는…. 누구나 한번쯤 그런 경험을 했으리라. 그가 없으면, 별도 달도 해도 보이지 않아. 바다를 봐도 숲을 걸어도 너만 보여.

영화관을 나와 오든의 시집을 다시 찾아 읽었다. 내가 갖고 있던 오든의 번역시집에는 ‘모든 시계를 멈추고’로 시작하는 시는 없었다. 1994년에 영화가 개봉되었으니,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던 때라 제목으로 시를 검색할 방법도 없었다.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은 우유부단한 영국 남자 찰스와 적극적인 미국 여성 캐리 그리고 찰스의 친구인 독신 남녀들이 진실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다. 휴 그랜트의 떨떠름한 표정도 멋지지만, 앤디 맥다월이 커다란 모자를 쓰고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보통의 할리우드 여배우처럼 천박하지 않은 분위기와 자연스러운 연기에 나는 반했다. 착하면서도 예쁜 여자라는 표현이 딱 맞다.

토요일 저녁에 유튜브에서 오든의 시와 생애를 다룬 BBC 다큐멘터리 ‘내게 사랑의 진실을 말해 줘’를 보았다. 오스트리아의 어느 마을에서 거행된 시인의 장례식으로 필름은 시작한다. 그의 시 ‘장례식 블루스’가 울려퍼지고 조문객들(대다수가 남자였다)을 보여 주던 카메라는 뚱뚱한 중년 남자 앞에서 멈추었다. 오든과 30여년을 같이 살았다는 체스터 캘먼은 슬픔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오든은 1907년 영국의 요크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밑에서 세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첫사랑은 같은 학교에 다니던 다이빙선수였다. 어려서부터 그의 동성애 취향은 확실했고, 옥스퍼드대학에서 작가 어셔우드를 만나 함께 글을 쓰며 깊은 관계를 맺었다.

아이슬란드와 중국을 여행한 뒤에 1939년 오든은 미국으로 이주했다. 자신이 가르치던 유대인 학생 체스터 캘먼과 사랑에 빠진 오든은 미국시민권을 획득했고, 평생의 반려자가 될 체스터와 동거를 시작했다. 시뿐만 아니라 희곡도 쓰고, 잡지 편집자이며 에세이 작가로 이름이 높았던 오든은 인생의 후반부를 뉴욕과 오스트리아의 저택에서 보내다 1973년 빈에서 사망했다.
2016-12-22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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