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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窓] 누가 촌로의 가슴을 얼어붙게 했나/고진하 시인

[생명의 窓] 누가 촌로의 가슴을 얼어붙게 했나/고진하 시인

입력 2016-11-11 18:00
업데이트 2016-11-1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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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 시인
고진하 시인
올해 들어 찾아온 첫 추위, 코끝이 맵고 아리다. 대문 앞 텃밭에도 된서리가 내려 풀들을 푹 삶아 놓았다. 된서리 맞은 풀들을 보고 있자니, 요 며칠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며 분노와 절망과 참담함으로 주저앉은 이웃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어제 오후엔 날씨가 영하로 내려간다는 보도를 접하고 해 질 녘 텃밭의 김장 무를 뽑았다. 얼어붙기라도 하면 말짱 도로아미타불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뽑아서 대문간에 모아 덮어 두었던 무를 아침부터 식구들이 오순도순 둘러앉아 다듬었다. 때깔 좋은 무청을 칼로 자르고 있는데, 내가 잘라 놓은 무를 비닐봉지에 차곡차곡 담고 있던 아내가 무청처럼 풋풋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이제 무청을 엮어서 처마 끝에 달아 주세요.”

잘 말린 무청은 영양가가 높고 몸을 해독하는 데도 좋다고 한다. 그래서 해마다 무청 한 이파리도 내버리지 않고 볏짚으로 엮어 처마 끝에 매달곤 했다. 그렇게 말린 시래기로 된장국을 끓여 먹는데 우리 가족은 시래기 된장국을 일품 요리로 친다. 매일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대형마트에 가면 먹을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시절, 시래기는 사람들에게 쓰레기 취급을 받지만, 그래도 시골에선 여전히 소중한 먹거리다. 시래기를 엮는 건 해마다 해 온 연례행사라 나는 두 시간 만에 여덟 타래나 엮었다. 시래기 타래를 바깥채 처마 끝에 다 매달고 나니, 아내가 엄지를 들어 올리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히히, 아내 칭찬을 받으면 이 나이에도 하늘을 날 듯 기분이 좋으니, 난 천생 푼수일까.

무청을 다 엮고 나니, 또 겨우살이 준비가 기다리고 있다. 낡은 한옥의 겨울은 몹시 춥고 길다. 통나무 학교를 운영하는 후배가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라고 올해도 땔감을 트럭 가득 실어 보내 주었다. 안채의 주방 겸 거실에 있는 화목난로와 온돌인 내 서재에 사용할 땔감이다. 오늘부터는 통나무를 톱으로 자르는 작업을 해야 한다. 물론 혼자 해야 한다. 혼자 하는 일은 몹시 힘들고 더디다. 하지만 급할 거 뭐 있나.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기계톱을 이용해 설렁설렁 자를 작정이다. 시골에는 젊은이들이 없고 노동력이 턱없이 부족하니, 노인들이 대부분 혼자 일을 한다. 혼자 일을 해도 불평하는 이를 보지 못했다. 젊은 날 먹물로 살아온 내가 나이 들어 시골로 솔가한 후 홀로 육체노동을 즐기게 된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참 신통방통하다. 허허, 참. 이러구러 난 늦깎이로구나. 몸을 사용하는 노동의 기쁨을 이제야 발견했으니.

살갗을 에일 듯한 쌀쌀한 날씨지만 무거운 기계톱을 들고 나무를 자르다 보면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나는 지치도록 일하지 않는다는 나름의 규칙을 세우고 사는 터라, 기계톱을 땅에 내려놓고 목에 둘렀던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통나무 위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때 누가 등 뒤로 와서 말을 건넨다. 돌아보니 마을 노인회장님이시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얼굴이 편치 않아 보이신다. “고 선상, 겨우살이 준비하시는구먼!” “네, 회장님.” “지금 경로당에서 TV 뉴스를 흘끔거리다가 나오는 참인데, 나라를 통째로 말아먹은 저 인간들은 겨우살이 준비 같은 것 모를 거라. 그렇게 엄청나게들 해 처먹었으니 말이우.”

분노를 억누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는 경로당 회장의 얼굴에서는 을씨년스런 냉기가 묻어났다. 누가 저 촌로의 가슴을 저토록 얼어붙게 했단 말인가. 항상 여유가 넘치고 농담도 잘하던 분이었는데, 해맑은 얼굴엔 늘 봄기운이 파릇파릇했는데….
2016-11-12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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