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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박근혜의 고독과 민주주의의 공백/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사회학과 교수

[시론] 박근혜의 고독과 민주주의의 공백/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사회학과 교수

입력 2016-11-07 22:38
업데이트 2016-11-07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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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사회학과 교수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사회학과 교수
과거의 철학자나 정치학자를 공부하다 보면 스피노자나 마키아벨리처럼 당대인은 물론 후대에도 오랜 기간 이해되지 못하거나 오해받은 이들을 만나게 된다. 주위의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시대를 앞선 사상가의 고독. 그런데 요즘 박근혜 대통령에 관한 기사들을 보다 보니 이와 다른 종류의 ‘고독’도 있을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든다. 주변 누구의 얘기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지만 그걸 드러내선 결코 안 되기에 누구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을 수도 없는, 그러나 최고결정권을 가진 자리에 있기에 어떤 식으로든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 고독. 어디로 가는 게 옳은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국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해야 하는 권력자의 고독.

박 대통령이 사제나 연인관계도 아닌데 저토록 어느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기대고 의지했던 것은 이런 고독 때문이었을 게다. 거의 유일하게 고독이 야기하는 감정적 고립감을 해소하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결정해야 할 때 유일하게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이 최순실이었을 테니까. 그러니 그가 얘기해 주는 것은 비록 그것이 ‘강남 아줌마’들의 수다에서 나온 것이든, 자기 주위의 이해관계 말고는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리사욕에서 나온 것이든 어떤 것도 저 고독한 이의 텅 빈 머릿속을 채우게 됐을 것이다.

사실 지금 와서 보면 이런 징후를 일찍이 감지해 경고한 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말이 진실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명색이 대통령인데 ‘설마 그럴 리가’ 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경제도 외교도, 아니 정치도 모르지만, 오직 하나 권력 앞에서 사람들의 속성은 잘 알고 있었고, 조금만 맘에 안 들면 가차 없이 잘라 내는 냉혹함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과묵함은 무지가 아니라 속내를 감추는 카리스마적 기질 때문이라고들 생각했다. ‘불통’이라고들 비판했지만, 그건 남 얘기를 잘 안 듣는 독선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남 얘기를 알아듣지 못하고 사태를 파악할 수 없는 무능 때문일 거라곤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정치는 혼자 하는 게 아니며, 대통령이 모든 걸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훌륭한 판단력을 가진 이들이나 사안마다 필요한 지식을 가진 이들을 사용할 줄 아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어떤 이가 똑똑하고 어떤 이가 사욕에 따라 행동하는지, 어떤 말이 옳고 어떤 말이 잘못된 것인지를 가릴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안목 없는 이들은 자기 머릿속의 공백을 듣기 좋은 말들로 채우고, 자신 감정의 공백을 아부하는 이들의 감각으로 채운다.

이런 것을 잘 알기에 왕조정치 시대엔 어려서부터 ‘제왕학’을 가르쳐 왕이 될 사람의 머릿속을 통치에 관한 지식이나 기술로 충분히 채우고자 했고, 똑똑한 이와 올바른 이를 가릴 줄 아는 안목을 길러 주고자 했다. 그러나 권력자가 될 인물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은 민주주의 체제에선 그게 불가능하다. 심지어 민주주의 체제에서 권력자의 자리는 공백으로 비워져 있으며, 적어도 원리상으론 누구든 그 자리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 그 빈자리에 똑똑하고 유능한 인물이 들어선다면 그 사회는 원활하고 공정하게 움직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대로 엉망이 될 것이다. 권력자가 그러하듯 대중 또한 빈자리를 맡길 인물을 고르는 안목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무능한 권력자의 고독은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지만, 대중들의 잘못된 판단은 대중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중이란 혼자가 아니라 끝없이 토론하고 평가하고 다투고 합심하는 수많은 이들의 ‘소란’에 의해 만들어지는 집합체이기에. 권력자의 저 난감한 ‘고독’마저 바로 이 대중들의 ‘소란’이 해결해 줄 수 있다. 누구는 ‘박근혜도 피해자’라며 동정의 감정에 호소하려 하는데, 정말 불쌍하다고 할 게 있다면 그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는 저 난감한 고독을 남몰래 4년 가까이 감내해야 했다는 점이다. 그 고독이 더는 지속되지 않도록 우리가 도와주어야 한다. 콘크리트 지지자들마저 ‘임금님이 벌거벗었음’을 알게 된 이 마당에 그의 고독을 계속 두고 보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비어 있던 자리를 다시 비우는 것, 그것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우리 대중들에게 주어진 가장 일차적인 과제다.
2016-11-0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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