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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로 시민의 단상] 국치일을 다시 생각한다

[윤용로 시민의 단상] 국치일을 다시 생각한다

입력 2016-08-28 22:06
업데이트 2016-08-28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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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로 법무법인 세종 고문·전 외환은행장
윤용로 법무법인 세종 고문·전 외환은행장
러시아를 방문해 식당 등에 가게 되면 “러시아는 공산주의 시대를 거쳤기 때문에 서비스가 좀 시원치 않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실제로 그런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시작된 것이 1917년이니 지금으로부터 채 100년이 되지 않는 시기다. 그렇다면 공산주의 이전의 수세기에 걸친 세월도 러시아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텐데 왜 유독 최근 100년이 현재의 행태에 그렇게 큰 그림자를 드리우는가 하는 것이 늘 의문이었다.

최근 몇몇 여자 연예인들이 함께 부른 ‘샷업’이라는 노래를 우연히 들었는데 여기서 의문의 단초가 조금은 풀렸다. 샷업이라는 영어 제목을 보고 최신 트렌드의 노래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중간에 “빳데리가 다 돼서 전화를 못 받았어”라는 표현이 있어서 깜짝 놀랐다. ‘샷업’이라는 영어를 썼다면 ‘배터리’라는 표현이 어울릴 텐데 왜 ‘빳데리’라고 했을까 하고 생각해 봤다. 제작자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쓰는 어휘를 썼다고 추측해 본다. 이 노래를 부른 분들은 모두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경험하지 못한 해방 이후 출생들인데도 그런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지배의 잔재는 이처럼 아직도 우리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제 이전까지의 모든 역사를 넘어 20세기 초 35년의 경험이 그 두 배가 넘는 71년이 지나도록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어렸을 때 엄마가 해 주신 음식으로부터 길든 입맛이 평생을 가듯이 왕정국가 해체 후 근대화 초기에 받은 영향이기에 오래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일본은 식민 지배 기간 동안 매우 치밀하게 우리의 모든 분야를 바꾸어 놓았다. 그간 일제 청산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아직도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잔재 중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작업도 이제는 더 정교하게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우리가 모두 빚을 지고 있는 애국지사들의 후손에 대해 체계적인 보살핌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일제 청산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 특성상 유사 이래 긴밀한 관계를 맺어 오고 있다.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견제하는 그야말로 애증의 관계인 것이다. 최근 미사일 발사와 핵 진전으로 도발로 치닫고 있는 북한과 사드를 계기로 긴장 관계를 보이는 중국, 늘 지정학적 입장에서 지켜보고 있는 러시아 등 동북아의 엄중한 정세는 많은 전문가가 열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구한말과 비슷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힘이 없어 어디에도 기대기 어려웠던 백 년 전의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요구할 것은 당당히 요구하되 주변의 지정학적 변화를 고려하면서 감정적인 접근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이성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과거는 잊지 않되 미래를 생각하면서 현명하게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최근까지 엔저 현상에 힘입은 바도 많지만 많은 사람이 일본으로 여행을 가고 일본의 음식, 풍습, 예술에 대해 호감을 느끼고 있다. 또 많은 일본인도 한류 등으로 우리나라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특히 미래세대인 양국의 젊은이들이 우호적·협력적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교환 프로그램 등 많은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난 주말 한·일 재무장관회의가 오랜만에 열린 것도 잘된 일이다.

오늘 우리가 106년 전 나라를 잃었던 국치일이 다시 돌아왔다. 요즘은 국치일이 과거처럼 잘 기억되지도 않는 것이 현실이다. 나라를 찾은 광복절도 중요하지만 나라를 잃은 국치일에서 더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시각에서 보면 매우 아쉬운 일이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의 저자 한명기 교수는 조선왕조가 경험했던 모든 전쟁은 조선의 잘못이 아니라 ‘세계질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100년 후 우리 후손들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해 선진국을 일구었다고 우리에게 고마워할 수 있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법무법인 세종 고문·전 외환은행장
2016-08-29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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