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페이지

[생명의 窓] 테베를 떠나시오/이재무 시인

[생명의 窓] 테베를 떠나시오/이재무 시인

입력 2016-08-19 23:06
업데이트 2016-08-20 00:21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이미지 확대
이재무 시인
이재무 시인
20세기 최고의 작가군에 속한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1968년 체코 프라하에서 반짝 민주화의 봄이 열림과 동시에 소련군 탱크가 진주한 이후 숨 막힐 듯한 공포 속에서 역사적 상처가 주는 무게 때문에 단 한번도 ‘존재의 가벼움’을 느껴 보지 못한 현대인의 초상을 네 남녀의 사랑을 통해 보여 주는 역작이다.

이 인상적인 소설에서 내가 가장 주목한 대목은 남자 주인공인 의사 토마시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피력했다는 이유 때문에 거듭되는 불운을 겪게 되는 내용이었다. 즉 토마시는 한 유력 잡지에 체코 공산주의자들의 위선적인 행위를 기고한 혐의로 유능한 외과의사에서 시골 병원 의사로, 또다시 유리 닦는 노동자로, 나중에는 운전사로 전락을 거듭하다가 급기야 불의의 사고를 만나 죽게 된다. 그는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일절 인정하지 않는 소련군 점령하의 프라하 공산주의 체제를 못 견뎌 했다. 토마시는 반성하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오이디푸스 신화를 차용하여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공산주의 체제는 범죄자들의 창조물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이 만든 것이었다. 훗날 이 천국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광신자들은 살인자였다는 것이 백일하에 밝혀졌다. 그러자 누구나 공산주의자를 비난했다. 비난을 받는 사람들은 대답했다. 우린 몰랐어. 우리도 속은 거야. 따지고 보면 우리도 결백한 거야! 토마시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와 동침한 줄 몰랐지만 사태의 진상을 알자 자신이 결백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자신의 무지가 저지른 불행의 참상을 견딜 수 없어 그는 자기 눈을 뽑고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났던 것이다. 토마시는 영혼의 순수함을 변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악쓰는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의 무지 탓에 이 나라는 향후 몇 세기 동안 자유를 상실했는데 자신이 결백하다고 소리칠 수 있나요? 자, 당신 주의를 돌아보셨나요? 참담함을 느끼지 않나요? 아직도 눈이 남아 있다면 그것을 뽑아 버리고 테베를 떠나시오. 토마시는 오이디푸스에 대한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글로 써서 잡지에 투고했다. 토마시는 체코 공산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통감할 것을, 오이디푸스 왕처럼 제 눈을 찌를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기고했다가 그것이 문제가 되어 철회 요구와 타인들의 웃음거리 중 결국 추락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 장면에서 생소하지 않은 데자뷔가 드는 것은 왜일까. 해방 이후 우리는 소련 지배하의 프라하 공산주의자들의 얼굴을 한, 자기변명과 합리화에 능숙한 정치인과 경제인들을 수없이 보아 왔다. 백일하에 드러난 범죄의 증거 앞에서도 결백을 주장하다가 빼도 박도 못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기억에 없다, 모르고 한 일이다 등의 비겁한 언사로 책임을 모면하려고만 드는 우리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드물지 않게 보아 왔던 것이다. 자신의 무지가 저지른 일임에도 그것이 죄로 드러났을 때 책임을 지고 스스로 형벌의 길을 떠났던 오이디푸스와는 반대로 음흉한 계획과 의도를 가지고 저지른 죄과마저도 특수 신분의 지위를 악용해 면책하려 드는 그들과 프라하 공산주의자들은 본질 면에서 무엇이 다른가. 나는 이 시대 위선적인 위인들에게 토마시의 어조를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당신들의 가공할 범죄로 이 나라는 앞으로 몇 세기 동안 희망을 상실했는데 당신들이 결백하다고 소리칠 수 있나요?
2016-08-20 22면

많이 본 뉴스

의료공백 해법, 지금 선택은?
심각한 의료공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의대 증원을 강행하는 정부와 정책 백지화를 요구하는 의료계가 ‘강대강’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사회적 협의체를 만들어 대화를 시작한다
의대 정원 증원을 유예하고 대화한다
정부가 전공의 처벌 절차부터 중단한다
의료계가 사직을 유예하고 대화에 나선다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