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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雪國이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雪國이었다

김승훈 기자
입력 2016-02-01 23:42
업데이트 2016-02-02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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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설국’ 무대 日 유자와 문학기행…교보문고-대산문화재단 9년째 진행

‘날이 밝자 설국(雪國)이었다. 세상이 새하얘졌다.’ 눈의 고장 일본 니가타현 유자와는 동이 트면서 진경을 드러냈다. 밤새 내린 눈이 소담스럽게 쌓여 온 마을이 은빛으로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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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첫 문장에 나오는 ‘국경의 긴 터널’인 시미즈 터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첫 문장에 나오는 ‘국경의 긴 터널’인 시미즈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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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한 료칸에서 바라본 유자와 설경. 밤새 내린 눈으로 순백의 설국이 펼쳐졌다.
다카한 료칸에서 바라본 유자와 설경. 밤새 내린 눈으로 순백의 설국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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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묶으며 설국을 집필했던 다카한 료칸 안내판.
1930년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묶으며 설국을 집필했던 다카한 료칸 안내판.
유자와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의 대표작 ‘설국’의 무대다. 교보문고와 대산문화재단은 2007년부터 ‘설국’의 무대인 유자와를 둘러보는 문학기행을 진행해 오고 있다. 교보문고 우수고객 등 해마다 20~30명 규모의 ‘설국기행단’을 꾸렸다. 올해도 지난달 24일 3박 4일 일정으로 26명의 문학도들이 설국으로 떠났다. 고운기(55)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가 기행단을 이끌었다. 고 교수는 첫해부터 지금까지 9년간 설국기행을 이끌고 있다.

가와바타는 군마현과 니가타현을 잇는 시미즈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눈의 나라’ 유자와를 봤다. ‘설국’의 첫 두 문장이 태어난 순간이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소설 첫 문장의 강렬함 때문이었을까. 땅거미가 질 무렵, 시미즈 터널을 통과할 때 기대가 컸다. 가와바타가 터널을 지났을 때와 비슷한 시간대여서 더더욱 그랬다.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마을을 상상했다. 버스가 11km가 넘는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기대에 찬 눈으로 차창 밖을 내다봤다. 눈 덮인 자연도, 마을도 없었다. 고 교수는 “이상기온으로 눈이 예년에 비해 3분의1도 오지 않았다”고 했다. 산정의 먹구름이 어둠을 더욱 짙게 했다.

숙소인 다카한 료칸(旅館)에 짐을 풀었다. 가와바타는 이곳 2층 방에 머물며 ‘설국’을 썼다. 지금도 그가 묵었던 방은 예전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설국은 이튿날 날이 새면서 시작됐다. 전날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마을이 온통 순백의 은색이었다. 곳곳의 삼나무들은 눈꽃을 피웠다. 마을을 둘러싼 에치코산맥은 설무(雪霧)로 휩싸였다. 신비의 향연, 그 자체였다. 가와바타가 오늘날 ‘설국’을 다시 쓴다면 아마도 첫 문장은 바뀌었을 듯하다.

가와바타가 묵었던 방에 들어갔다. 10첩 다다미방이었다. 벽에는 소설 속 여주인공인 고마코의 실제 모델이었던 료칸의 게이샤 마쓰에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화로 곁 의자에 앉아 창밖으로 눈 내리는 마을 전경을 내려다봤다.

가와바타의 문장이 왜 시적인지, 왜 그토록 ‘슬프도록 아름다운’ 말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설국은 그의 언어 또한 순은의 시로 빚어내게 한 듯했다. 종일 내리는 눈을 뒤로하고 설국을 빠져나왔다.

글 사진 유자와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2016-02-02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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