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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窓] 겨울밤의 다듬이소리/이재무 시인

[생명의 窓] 겨울밤의 다듬이소리/이재무 시인

입력 2015-12-25 17:48
업데이트 2015-12-25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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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시인
이재무 시인
겨울밤에 울려 퍼지던 다듬이소리가 그립다. (생략) 장단완급의 소리가 키 작은 담장을 넘어 마을의 고샅길을 나선다. 이웃집 아줌마, 윗말 사는 당숙모 다듬이소리도 사립을 빠져나오고 있다. 소리들이 깍지를 끼고 소리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소리들이 팔짱을 낀다. (생략) 달빛은 하얗게 눈밭에 그렁그렁 스민다. 컹컹 컹컹 컹컹 짖는 개소리와 부엉부엉 우는 부엉이 울음도 다듬이소리들이 세운 울타리를 넘지 못한다. (졸시 ‘다듬이 소리’ 부분)

어머니를 떠올리면 자연 함께 떠올려지는 다듬이소리. 나는 이 소리를 평생 잊지 못하고 살 것이다. 지금도 그 소리에 묻어 오는 어머니의 숨결과 체온이 손에 잡힐 듯 고스란히 느껴져 온다. 다듬이소리의 발원지는 언제나 윗말이었다. 윗말을 빠져나온 다듬이소리는 득달같이 언덕을 넘어와 아랫마을 다듬이소리를 채근하여 불어내서는 소리의 바통을 넘겨주었고 바통을 이어받은 아랫마을 다듬이소리는 뒷산 허리를 비켜 돌아 이웃 마을 키 작은 담장들을 타 넘고 들어가 또 다른 소리의 주자들에게 바통을 넘겨주었다. 그렇게 해서 이 마을 저 마을에서 들려오는 고저장단의 화음이 밤하늘을 반짝반짝 수놓게 되는 것이었다. 간간이 밤바람 소리와 부엉이 울음소리가, 다듬이소리들이 무명 직물로 짠 스크럼의 틈새를 노려보지만 소리의 결들이 어찌나 밭고 촘촘한지 번번이 실패하고야 만다.

그러나 자정이 지나면서부터는 여름 저녁 무논에서 들끓던 개구리울음 같던 다듬이소리도 시나브로 한풀씩 꺾여져 숨이 끊어져 갔는데 그러다가 완전히 소리의 숨통이 끊겼을 때 찾아오던 그 깊이 모를 정적감은 가히 적막의 심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다듬이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다 보면 그 소리의 마디와 가락에는 소리 임자들의 각기 다른 생의 감정과 사연이 다양한 무늬로 물들어 있음을 알게 되는데 그것을 인지했을 때의 즐거움과 고통이 컸다. 소리의 주체들은 단순히 의식주라는 현실 생활의 방편만을 위해 쾌락과 고통을 연주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다듬이질의 단순 반복의 동작과 리듬 속에 각자의 삶의 세목과 나날의 요철을 담아냈으며, 서로서로 그 두드림의 행위를 통해 각자의 애환과 형편과 곡절 등을 속속들이 동정하고 이해하고 소통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다듬이소리는 소리 주체들인 어머니들의 유일무이한 음악이었고 사색의 수단이었고 나아가 타자와의 무의식적 교감의 매체였던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내게 다듬이소리는 하이데거식 표현을 빌려 말하면 그날의 ‘존재’(神/어머니)를 거듭 떠올려 다시 살게 하는 ‘존재자’(자연사물/다듬이소리)인 셈이다.

그러나 이제 다듬이소리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진, 아득한 과거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기술의 최첨단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다듬이소리란 한낱 옛 향수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나는, 왜, 아직도, 감정의 가뭄을 겪을 때마다 구습을 벗지 못하고 뜬금없이 시대의 지진아처럼 예전의 소리가 물기를 띠며 절절해지는 것일까? 그것은 다듬이소리에는 오늘날 그 어떤 현란하고 고급스러운 음계로도 담을 수 없는 어머니들만의 공동체적인 삶과 아우라,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내 처지로 알아 이해하며 공유하고자 했던 덕성, 인내하는 끈질긴 기다림 등의 덕목들이 소리의 살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다듬이소리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내 몸에 정서적 충전의 플러그를 꽂는 셈이 되는 것이다.
2015-12-2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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