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희 도쿄특파원
지난달 22일 열린 ‘도쿄대행진’을 취재하며 이번에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이 부러웠다.<서울신문 9월 23일자 15면 참조> 도쿄의 심장이라는 신주쿠에 1000여명의 일본인이 모여 한목소리로 외친 것은 다름 아닌 ‘차별 없는 세상’이었다. 일본도 사회적 부조리와 갈등이 왜 없겠냐마는, 이날 모인 이들에게 그보다 더 심각하게 다가온 것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최근의 분위기였다. 과격 우익 단체의 혐한 시위가 기승을 부리는 통에 집회의 주제는 재일 한국인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증오 발언)를 비판하는 것으로 모아졌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들은 “재일 한국인, 여성, 성적 소수자, 장애인 등 다양한 사람이 공존하는 일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대의를 위해 1963년 워싱턴 평화대행진을 본뜬 ‘도쿄대행진’에 참가한 것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시위를 접했지만 이런 종류의 시위는 처음이었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최근 10년간 서울에서 열린 집회의 대부분은 명확한 이해관계와 요구사항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굵직한 것만 나열해도 2002년 미군 장갑차 사건으로 불거진 반미 집회, 2004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 반대 집회,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 등이 그렇다. 이런 집회가 나쁘다고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보다 한 차원 높은 인권이나 평화를 위해 많은 사람이 집회를 벌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한때 한국 사회도 미국이나 프랑스, 일본처럼 대의를 위해 떨쳐 나서던 시절이 있었다. 무수히 많은 이들의 희생을 통해 일궈낸 성취도 있다. 일본 사회운동가들이 부러워 마지않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그렇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는 구성원의 인권과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인색해졌다. 이 정도의 인권이라면 괜찮다는 사회적 합의가 생긴 것일까, 아니면 ‘먹고사니즘’, ‘우리끼리즘’에 경도돼 나나 내 가족의 안위와 관계가 없다면 다른 사람의 인권이나 전 세계의 평화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것일까. ‘도쿄대행진’과 단순히 비교하자면 서울 명동에 1000명의 인파가 모여 “차별은 하지 말자, 함께 살자”고 외치며 오직 평화만을 위해 집회를 연 적이 과연 있었던가.
한 나라의 ‘국격’을 재는 척도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저마다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서 국격의 척도는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도 국적, 인종, 성별을 떠나 타인의 아픔을 공감해주는 인권 감수성이 있는 나라인지 여부다. 도쿄대행진을 보고 내 마음속에서 일본의 국격은 조금 올라갔다. 조만간 서울대행진이 조직돼 그 집회를 취재하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haru@seoul.co.kr
2013-10-05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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